복음의 능력과 믿음의 길 – 장재형목사

1. 복음의 능력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의인의 의미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전한 본문의 말씀(롬 1:16-17)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핵심 구절을 중심으로, 로마서가 제시하는 복음의 능력과 구원, 그리고 믿음의 의미를 심도 있게 다룬다. 이 말씀은 장재형목사의 목회적 시각 속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그가 여러 차례 강조해 온 ‘성도들의 구원 확신’과 ‘복음 중심의 삶’이라는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로마서 1장에서부터 8장까지 이어지는 구원의 서사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고, 8장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그러나 로마서 전체를 관통해 볼 때, 사실 가장 핵심이 되는 요절은 바로 1장 16-17절이며, 특별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로마서 전반의 핵심 주제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울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떠한 태도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압축적인 선언이다. 장재형목사 역시 해당 본문을 자주 인용하며, 복음에 대한 자부심과 담대함, 그리고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사도 바울이 이 핵심 구절에 이르기 전, 1장 1-15절까지는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인사와 함께, 바울이 왜 로마에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서론적 배경을 제공한다. 16절부터 시작되는 본격적 서술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능력과 역사를 서신의 전면에 드러낸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는 문장 안에는 당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로마 제국의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도의 담대한 선포가 응축되어 있다. 이때 로마라는 도시는 당대 최고의 번영과 지배력을 자랑하는 제국의 수도였고, 그 안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으로 하층민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나 로마 교회 모두 사회적 지위가 낮고, 학식이 부족하며,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이 많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서 자신과 동역자들이 “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묘사할 정도로, 초기 기독 공동체는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 핍박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은, 복음이 당대 사회에서 지배층이나 지혜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복음이 본래 세상 권력이나 지혜자들이 볼 때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목한다. 왜냐하면“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라는 사도적 선언이 보여주듯이, 복음의 본질이 세상의 자랑이나 인간적 공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힘과 재물, 학문적 지식, 혹은 개인적 업적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기원과 목적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죄인을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는 초월적인 은혜와 사랑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고린도전서1장에서 바울이 지혜자와 변론가들을 향해 “그들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외치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만으로는 죄의 뿌리를 해결할 수 없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복음 신앙의 강조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복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적 결정에 기초한 은혜임”을 말하며,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지려 노력한다 해도 한계가 분명함을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이 믿음이 곧 죄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열쇠이며, 결국“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영원히 산다”는 확신이 형성된다. 로마 제국이 아무리 강성하더라도, 세상의 가치가 아무리 빛나는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확신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의 영적 근거다.

이어서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이 절은 로마서 전체뿐 아니라, 신약 신학 전체에서 핵심적인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의는 인간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이 의로워질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방편이며, 복음은 이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사랑이 모든 믿는 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기쁜 소식이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3장 21절 이하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진술을 특히 강조하는데, 이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길이 봉쇄되었음을 알려준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과 뜻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 스스로 그것을 완벽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율법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죄가 무엇이고 죄의 값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려주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망’과 ‘심판’의 두려움을 초래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 율법의 저주나 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담당하셨음을 선포한다. 그래서 죄인이“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것을 붙드는 통로가 바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내 삶 전체를 의탁하고, 그분이 베푸신 구원의 사랑을 받들어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결단을 포괄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은 또한 구약 하박국 2장 4절에 나타난 예언적 선언을 신약시대에 가져와, 바벨론의 강력한 침략과 유다 왕국의 멸망 위기 속에서도 ‘마침내 남은 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설명한다. 이처럼 하박국 선지자가 망루에서 간구했듯,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의 선언을 바울이 복음의 시대로 확장시킨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세상이 망해가고 심판을 받으며, 제국의 압력이 강해져서 교회가 핍박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믿음으로 사는 자는 마지막까지 건짐을 받을 것이고, 영생의 소망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오직 믿음으로”라는 표현은 교회 공동체의 확신이자,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버팀목이었다.

바울에게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자를 뜻한다. 공동번역 성서 등에서 의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옮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들어온 죄성과 사망의 법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따라서 구원은 곧 하나님 앞에 다시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 복음적 관계 회복은, 신학적으로는 ‘이신칭의(以信稱義)’ 혹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요약된다. 장재형 목사도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전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야말로 인간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사건이며, 우리는 그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개인 구원에만 머물지 않고,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책임으로도 확장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신앙인이 단순히 자신의 죄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복음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증언하며 살아가야 함을 전제한다. 또 한편으로는, ‘행위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연약하고, 하나님 앞에 전적인 죄인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이 구원의 기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이것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구원받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동적 사랑에서 비롯되며, 인간은 단지 손을 펴서 그 선물을 받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행했던 할례나 율법 준수의 노력, 헬라인들이 추구하던 지혜나 철학적 탐구, 로마 제국이 자랑하던 권력이나 영광, 그 어느 것 하나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따라서 복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이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토록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배경에는,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극심한 사회적 압박이 있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기독교를 로마의 전통 신앙체계나 황제 숭배에 위협이 되는 집단으로 보았고, 민중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수치스러운 형벌로 죽은 예수를 ‘신’ 혹은 ‘구세주’라고 부르는 사실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복음 전도자들은 조롱과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바울이나 장재형 목사 같은 복음 전파자들은, 복음만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생명의 도’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주일 설교나 성경 강해에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결코 수치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자주 피력해 왔다. 그는 복음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가슴 깊이 깨달은 사람이라면, 오히려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결국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믿음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다. 바울이 말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표현에는, 먼저는 주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 사건을 ‘믿음으로’ 붙잡고, 그 믿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수되어,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가 믿음 안에서 확장되어 간다는 뜻이 녹아 있다. 믿음은 개개인의 결단이지만, 동시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순환·확장·성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시작된 복음이, 사도들을 통해 전파되고, 수많은 성도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진 것도 결국 믿음의 역사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복음 전파가 그저 언어적 설득이나 논리적 교리를 가르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과 헌신이 동반된 ‘삶의 증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은 세상 속에서 의를 행하며, 복음이 가진 생명력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에서 또 다른 믿음이, 세대로부터 세대로 이어지고, 복음이 끊임없이 증언되는 것이다.

바울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라고 말한 복음은 결코 소수 엘리트나 특정 민족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로마서 1장 16절 후반부에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한 것은, 구원 은혜에 차별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유대인은 언약 백성으로 선택받았기에 구원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먼저 임했지만, 곧 이어 “헬라인”, 즉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확장되었음을 말한다. 이처럼 ‘구별 없는 구원’이 바로 복음의 포괄적 능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인종, 사회적 신분, 문화적 배경, 과거의 어떠한 잘못도 구원을 막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다만 “믿음으로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이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교만함만이 구원의 길을 스스로 차단할 뿐이다.

정리하자면, 제1소주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로마서 1장 16-17절이 선포하는 복음의 위력은, 이 땅의 그 어떤 권세나 지혜도 대체할 수 없는 ‘영원하고 전능한 구원의 통로’이며, 그것이야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로 로마서를 본격 시작한 것은, 초기 교회가 처한 사회적 멸시 속에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생명의 불꽃’을 그들 가운데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장재형 목사의 목회적 강조점 역시 이 복음의 능력, 의인의 삶, 믿음의 가치에 맞닿아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장차 올 미래에도 교회가 붙들고 있어야 할 핵심 구절이다.

2. 믿음으로 사는 삶

이제 두 번째 소주제로, 바울이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강조한 ‘복음의 능력’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구원론’이 어떻게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실제 생활에 연결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장재형 목사의 목회적 시각과 함께 고찰해 보자. 특히 장재형 목사는 선교의 최전선에서, 그리고 다양한 목회 현장에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또 그것이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돌파해 나가는 힘이 되는지를 자주 설파해 왔다.

우선, 복음이 지닌 ‘구원 능력’이 교회 내부와 외부를 향해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지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복음은“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교회 내부적으로 성도들이 서로를 대할 때, 또한 외부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을 때, 이 복음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장재형 목사는 먼저 교회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단순히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유기체”라는 뜻이다. “내가 받은 용서와 사랑이 너무나 크고 결정적이기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해 줄 수 있다”는 깨달음이 공동체 안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장재형 목사는 ‘말씀과 기도 중심의 교제’가 필수라고 말한다. 믿음이 단순히 교리에 대한 인지적 확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을 변화시키려면, 말씀을 통한 성령의 조명과 기도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 생활을 하게 되면, 신앙은 단지 종교적 습관이나 형식으로 전락하기 쉽다. 반면 성도가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깊이 묵상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면, 복음이 “실제로 나를 살게 하는 능력”임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믿음 안에 뿌리를 내린 교회 공동체는, 안으로는 서로를 세워 주고 위로하며, 밖으로는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 안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한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늘 ‘복음이 곧 생명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이 생명력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라는 성경의 대전환을 가리키며, 단지 인간의 육체적 생사를 넘어 영혼의 운명을 바꾸는 힘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 생명력을 잃으면, 곧 신앙은 힘을 잃고, 조직화된 종교 활동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는 프로그램이나 봉사, 사역 등 외형적 요소에만 매달리지 말고, 먼저 복음 자체가 가진 생명력을 붙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늘 마음 깊이 새기고, 개인의 영적 생명과 공동체의 영적 활력을 복음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 사회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는 일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물질 만능주의, 상대주의적 가치관, 윤리적 혼란 등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결코 ‘안락한 피난처’만을 제공할 수 없다. 장재형 목사가 설교와 세미나 등에서 거듭 지적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겠다”는 결단이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 어리석은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적 기준과 대립하기 쉬운 지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복음이야말로 ‘새로운 길’을 제공한다. 십자가로 대변되는 희생과 사랑의 능력은, 세상의 지혜나 권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며,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 마음에 진정한 회복과 소망을 준다.

예컨대 현대인이 겪는 고립감, 소외감, 불안, 우울, 자살 충동 등은, 경제적 풍요나 정보의 홍수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심리·정서적 위기는 영혼의 근본 결핍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장재형 목사는 상담 사역이나 치유 집회를 통해, “복음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치유”의 핵심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의롭다 칭함받은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삶에 대한 근본적 자신감이 생겨나고,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붙들 수 있는 힘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존감은 자기의 ‘행위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게 되는 동시에, “그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한가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회복의 길로 나아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복음의 인격적 적용”이라 부른다. 단순히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신학 교리나, ‘믿으면 천국 간다’는 표면적 구호 차원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내 내면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인간관계와 세상관을 새롭게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영혼이 치유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세워지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자리(가정, 직장, 학교, 사회)에서도 복음의 열매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정욕과 이기심으로만 충만했다면, 이제는 사랑과 섬김으로 변화되고, 물질이나 권력에 탐닉했던 마음이 이웃을 향한 관심과 희생으로 바뀌는 식이다. 결국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의인의 길”이다. 믿음은 단순 선언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과 열매를 동반한다.

바울에게서도, 믿음은 ‘행위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선한 행위를 낳는다. 로마서 후반부(12~15장)에서 바울이 교회 공동체의 윤리와 덕을 설파하고, 세상 권세에 대한 태도, 이웃 사랑, 약한 자를 배려하는 삶 등을 자세히 가르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장재형 목사의 목회 철학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교인들이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각자 삶의 현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격려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 크게 소리쳐 선언하는 구호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행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태도는, 오늘날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무조건 독선적으로 기독교를 강요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죄로부터의 해방,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공격적 주장’이 아니라 ‘초청’과 ‘헌신’의 언어에 가깝다. 십자가가 본래 수치와 조롱의 상징이었음에도, 예수님이 그 길을 기꺼이 걸으셨기에, 이제는 죄인 된 우리도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진수다. 장재형 목사는 다양한 세대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 자체가 가진 사랑의 힘을 결코 훼손시키지 않는” 소통 방식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믿지 않는 이웃에게 다가갈 때 그들의 아픔과 상황을 이해하고 경청함으로써, “너도 나처럼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받았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본질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가 성장주의나 물질주의에 빠지고, 때로는 정치적 편향으로 인해 복음 본연의 순수성이 오염되는 모습들이 비판받기도 한다. 바울이 당대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며,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 1:21)고 고백했듯, 교회 역시 겸손하고 섬김의 태도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겉으로 드러나는 ‘규모’나 ‘금전적 부유’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얼마나 ‘십자가’를 닮았는지, 얼마나 ‘구원의 복음’을 몸소 실천하는지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의인”들이 교회 안에 세워지고, 그들이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크리스천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분별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합하며, 세상 속에서 겸손히 그리스도의 도를 실천해야 한다. 바울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약의 선언을 신약 복음 안에서 재해석하고, 로마 제국 한복판에서 담대하게 선포했듯, 장재형 목사 또한 현대 문명과 가치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복음이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자 진리”라는 사실을 흔들림 없이 강조한다. 그리고 그 복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향해 사랑과 화해의 문을 여는 능력이라는 것을 거듭 가르친다.

결국 로마서 1장 16-17절은 구원론의 정수이자, 교회론과 윤리의 토대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여러 설교와 문서, 강해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가 해석하는 바울의 메시지 핵심은, 한 마디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참된 자유와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나, 제국의 변방에 몰린 자들이라도,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지는 격려와 위로이자, 동시에 세상을 향해 나아갈 용기와 소명이다.

“로마가 아무리 찬란해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가 증명한다. 반면 믿음으로 살았던 의인들의 증언은, 2천 년의 세월을 넘어 전해지고, 오늘도 교회 역사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살아 있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초시간적 능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예배에서, 선교 현장에서, 목양실 상담 자리에서, 또 신학교 강의실 등 다양한 현장을 통해, 바울의 이 강력한 선포를 재해석하고 적용하며, 많은 크리스천이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자부심’을 갖도록 이끌어 왔다.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며, 이 믿음이 있다면 어떤 역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해 변치 않는다.

오늘날도 여러 형태의 ‘로마 제국’이 존재한다. 물질적 풍요, 온갖 기술 발전, 문화적 다원성, 그러나 그 이면에는 도덕적 혼란과 영적 공허가 깔려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동일하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복음이“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담대히 선포하며, 삶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오직 믿음으로’ 붙들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나 바울의 선언처럼,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부터 영원에 이르는 생명의 길을 걷게 된다. 장재형 목사의 목회 철학에 의하면, 이것은 결코 머릿속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성도가 체험하고 누릴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다.

이렇게 두 소주제를 통해 로마서 1장 16-17절이 말하는 복음의 능력과 의인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로마 제국에 맞서면서 선포한 구원의 중요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하나님의 의라는 점을 정리했다. 이어서 장재형 목사의 목회적 적용을 중심으로,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을 어떻게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지를 고찰했다. 결론적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본문의 선언은 과거 초대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붙들고 간직해 온 신앙의 보루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 구원과 공동체의 정체성, 더 나아가 세상을 섬기는 선교적 사명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믿음의 길에 선 모든 이에게,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복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이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며,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힘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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