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의 멘토인 장재형 목사는 선교 사역을 전략적으로 펼쳐간다. 우리의 삶은 제한적이다. 나에게 두 자녀가 있는 데 빨리 결혼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두 자녀에게 20살에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계속 해서 강조하고 있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될 아들에게 연초에 ‘앞으로 네 결혼은 6년이 남았다’라고 말 했다. 6년이라는 시간이 짧은가? 아니다. 결코 짧지 않다. 스피닝을 20분간 해봐라. 베틀 로프라는 운동 기구가 있는 데 베틀 로프 20초만 해봐라. 20분, 20초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 지 알수 있을 거다. 허투르 시간을 보내버리니 짧게 느껴진다.
그런데 20년이 짧은가? 그렇다. 새해가 된지 벌써 40일 정도가 지났는 데 1월달이 어떻게 지났는 지도 모르게 지나버렸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다 보니 아침 점심 저녁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이렇게 11번만 반복해서 지나가면 1년이 금새 지나가는 거다. 아내에게 “1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안난다”라고 하니 결과물을 내 놨기 때문에 잘 했다라고 칭찬한다. 이렇게 1년이 지나가고 10번만 반복하면 10년이 지나는게 아닌가. 그러면 나는 60세로 환갑이 된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살아 간다는 건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매일의 목표가 있을 거고 한 주간의 목표 한달의 목표, 그리고 1년의 목표가 있을 거다. 미래의 무엇을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해 나가는게 우리 삶이지 않은가? 물론 목표를 잃어버리고 표류할 수도 있지만 목표가 없는 삶이라는 건 무미 건조 할 것 같다.
며칠 전 장재형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30년 40년 후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 아이를 키워보니 이 아이를 향한 바램이 생긴다. 나는 아이들이 3살 4살 정도 되었을 때 부터 하던 말이 있다.
“너는 누구로 말미암은 존재냐?”
“너는 어떤 존재가 될거냐?”
“너는 주님과 엄마 아빠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너는 어떻게 결혼을 할거냐?”
10년 정도 지난 지금도 나는 아들과 딸이 잠들기 전 종종 묻곤 한다. 그리고 3년 정도 전 부터는 이 네 가지 물음에 하나 더 해서 “결혼해서 아이를 몇 명을 낳을거냐?”를 추가했다. 자기 동생을 낳아 달라고 수 없이 요청했던 딸은 “10명”을 낳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3명”으로 줄어들었다.
위에 몇 가지 질문을 아이들에게 하고 또 대답은 내가 했다. 우리의 존재가 누구로 부터이고 그 존재의 의미는 나에게서 나오는게 아니며, 존재하는 것은 창조주가 만든 목적대로 살아가야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또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 건 무엇인지를 말하고 나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겨자씨 처럼 작은 아이들, 한 마디의 거친 단어만들어도 주눅이 들고, 눈물을 흘리는 여린 생명들이다.
내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게 많은가? 내가 이들에게 얼마나 오랜 시간 함께 할건가? 그건 부질 없다. 내가 해줄 수 없는게 더 많고 아이들 스스로 해야 하는게 살아 가는 순간 순간에 모든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아이들의 몫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거다. 내가 결혼을 해보니 내 배우자는 나랑 가장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면 갈등 때문에 행복한 시간 보다는 어렵고 불행한 시간이 더 많을 거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면 며칠 전 내 멘토인 장재형목사가 해준 말이다.
“무슨 일을 할 때 30년 40년 후의 모습을 생각해보고 출발 해야 하지 않겠니”
맞는 말이다. 자녀를 낳고 기를 때 이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그 아이가 어떠한 사람이 되고 어떠한 일을 해야 할지 어떠한 가족을 꾸리게 될지를 생각하고 매일 매일 자녀를 키워나가는게 아닌가. 불행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교회를 시작함에 있어서 그 미래를 생각해보고 시작해야 하는게 아닐까? 요즘 교회 개척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지 모르겠다. 개척을 해서 교회가 자립을 하기까지가 너무 시대가 되고 말 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년 배출되는 목회자들이 부목사만 할 수는 없는거 아닌가. 개척을 하는 신학생들은 과연 무슨 계획을 세우고 목회를 시작할까?
1992년 내 멘토인 장재형목사는 교회를 시작했다. 그러니 30년 전의 일이다. 그 교회는 장목사가 “나 개척합니다”이렇게 해서 시작된 교회가 아니라 어떤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궁금한 것들을 묻었고 그것을 대답해주고 알려주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교회를 시작하게 된 장목사님은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가 설교한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가르쳤고 이게 교회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베드로 사도의 “회개하라” 무엇을 회개 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고 하더라.
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70세가 훌쩍 넘은 장목사는 “새가 운다”고 표현하는 국민들이 있겠느냐고 종종 말 한다. “문풍지가 운다”라고 표현하는 국민들이 있겠냐고도 말 한다. 내가 여행한 나라는 몇 나라가 되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언어 학자고 아니고 문화인류학자도 아니다. 그걸 전공하지도 않았고 별 관심도 없어서 모르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독 이런 표현에 익숙한 것 같다.
영어는 새가 지저귀면 A bird sings라고 표현한다. 새가 노래한다와 새가 운다라고 말 하는 이들의 정서는 무엇이 다른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골에서 자란 나는 여름이 되면 논에서 개굴 개굴 하는 개구리를 보고 ‘개구리가 운다’라고 말했다. 함석헌은 그의 평화를 이야기 하면서 우리 나라는 침략을 한적이 없고 늘 침략을 당했던 백성이라고 했다. 늘 침략을 당해온 백성들이라서 눈물이 많은가?
장목사는 교회를 시작하면서 베드로가 말 하나 구원의 길에 대해 먼저 이야기 했다고 한다. ‘우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 이 관점에서 시작한 교회는 벌써 30년이 지났다. 베드로가 말 한 구원의 길이라는 건 생명의 주를 죽였다라는 걸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새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사도였던 베드로가 말 한 구원의 길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 사도가 말 한 구원의 길과는 좀 다르다.
어차피 이 두 길은 하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으로 귀결 되지만 출발점이 좀 다른거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외에는 없지만 그 길을 설명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거다. 하나는 베드로 사도, 하나는 바울 사도의 방법이 있다는 거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 사도의 방법을 먼저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이들인데 그 전에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고 그 구원받은 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시간이 지나보니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왔다. 내가 장목사님과 함께 한지도 벌써 20년이 지나 중년이 되었는데 뒤를 돌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다. 이제 20년만 더 뛰면 나도 70세가 된다. 그때는 안식할 수 있을거다.^^ 대부분 70세가 되면 은퇴하지 않은가
자 이제 하나 하나 써보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게 베푸신 은혜들을 써보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시편 66편 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