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베드로의 부인에 나타난 인간의 연약함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장면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른 세부 묘사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사건을 전해줍니다. 여기서는 요한복음 18장 22-27절을 중심으로,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31-32절, 사도행전 4장 1-12절 등 다른 성경 본문을 보조적으로 살피며, 베드로가 어떻게 그토록 쉽게 주님을 부인하게 되었는지, 그 인간적 연약함의 뿌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베드로의 실패는 당시 순간적인 두려움과 상황적 압박의 산물이었지만 동시에 그 뒤에 있는 영적 현실, 즉 사단의 시험과 인간 내부에 내재된 연약함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그 전에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마 26:35; 막 14:31)는 굳은 맹세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성급하고 과감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는 수제자로서의 당당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는 말로 마무리되는 비극적 부인의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2-27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공회 앞에서 무리에게 “내가 만일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3)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답변에 아무런 제대로 된 응답을 내놓지 못한 안나스는, 더 이상 예수님께 실질적인 죄목을 씌울 만한 것을 얻지 못하자 폭력을 가하고, 결국 예수님을 사위 가야바에게 보냅니다(요 18:24). 바로 이때,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는 그 시간에, 베드로는 바깥에서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께 접근해 무슨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고, 자기가 나서서 뭔가를 변호하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도 보호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적극적으로 예수님 옆으로 다가갈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두려움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예수님과 동일하게 재판대에 오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체포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이 발각될 경우, 그 동일한 심문을 받게 되거나 심지어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과연 주와 함께 죽을 각오가 실제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그의 행동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때 그는 여종이 제기하는 질문, 또 다른 종의 추궁을 피해 빠져나오려고 했고, 그렇게‘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거짓말을 연달아 하게 됩니다.
둘째, 인간적 ‘자만심’이 무너질 때 찾아오는 절망감과 당혹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자 중 가장 ‘주님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따르며, 어떤 위험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다’고까지 생각했던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현장에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는 모습(요 18:10)에서도 베드로의 성급하지만 헌신적인 태도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베드로가 정작 자신의 생명과 안전이 진짜 위협받는 듯 느껴지자, 그의 마음은 곧바로 ‘도망치는’ 쪽으로 기울고 말았습니다. 이는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큰소리가 무너지는 현장이었고, 동시에 주님 앞에서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도 크게 당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61절에 보면, 베드로가 세 번째로 부인하던 순간,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짧은 눈맞춤이 베드로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을 것이고, 그는 끝내 밖으로 나가서 통곡했습니다(눅 22:62).
셋째, 사단의 시험이라는 영적 차원이 깔려 있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눅 22:31)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미리 베드로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낱낱이 헤집고 시험하려고 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예수님을 따르겠노라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특별히 더 강한 공격의 목표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고와 동시에 전해진 주님의 격려는, 베드로가 분명히 넘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과 사명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나는 주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만 생각했고,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 가차 없이 무너졌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인간의 연약함은 바로 이 ‘순간적인 두려움’에서 가장 극명히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던 신앙 고백도, 실제 현장에서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느낄 정도의 상황이 닥치면, 그동안 쌓아왔던 확신이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이 흩어져 버릴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며,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고, 부인하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그때는 극도의 공포와 불안이 그의 내면을 뒤흔들었을 것입니다. 마치 한순간의 공포 앞에서 모든 결심과 작정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오늘날을 사는 크리스천들 역시 쉽게 겪을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신앙적으로 아주 확신 있어 보이다가도, 막상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혹은 사회의 편견과 압박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는 자리에 섰을 때 쉽사리 입을 다물어버리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을 하면서, 최대한 자신이 ‘예수와 아무 상관없는 자’처럼 굴려고 애썼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불빛이 희미할 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느 정도 위장할 수 있었으나, 막 불이 확 타오르면서 환해지자 그의 얼굴이 분명히 드러났고, 여종과 다른 이들이 ‘너도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 아니냐?’라고 대놓고 추궁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나는 아니다. 나는 그 사람과 아무 상관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세 번의 부인 후에 날이 밝아오면서 닭이 울었고, 그제야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눅 22:62). ‘이 순간만 피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조금만 더 버티면 혹은 숨으면 괜찮을지도 몰라’라는 얕은 생각이 결국 베드로를 죄의 깊은 수렁으로 이끌었고, 뼈아픈 후회의 자리에 세워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베드로가 그토록 통곡했던 이유는 단순히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자신해 왔던 ‘굳건한 믿음’, ‘주를 향한 절대적 헌신’이 한순간에 산산조각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환경과 상황이 급변할 때, 특히 생존이 걸린 긴박한 순간에 육체적, 정신적 공포에 의해 모든 영적 결단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마 26:41)라고 당부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베드로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우리를 뒤흔들려고 할 때, 우리가 우리의 힘과 의지로 버틸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베드로처럼 신앙의 선봉장이라 여겨졌던 이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경각심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며, 성경은 베드로의 ‘부인’ 사건에 매몰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뒤에 이어질 ‘회복’과 ‘새로운 헌신’의 스토리가 성경 전체 흐름 속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베드로의 부인이지만, 동시에 그 연약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지점에서부터 진정한 회개와 회복이 시작된다. 베드로는 세 번의 부인 이후 완전히 무너졌지만, 그 무너짐의 순간이 그를 온전히 낮추고, 이후 주님의 손에 다시 붙들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소주제에서, 베드로가 그 실패의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서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증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모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2. 부인 이후 베드로에게 임한 회복의 은혜와 증인의 사명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한 그 새벽 이후, 그는 한동안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타이틀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죄책감과 실패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주시는 순간, 특별히 베드로를 향해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누가복음 24장이나 요한복음 20-21장 등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중에서도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를 다시금 따로 불러 세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요 21:15-17). 이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그 과오를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회복시키시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세 번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에게 다시금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를 지적하시되 결코 정죄함으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회개하는 자를 붙드시고 다시 세워 증인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이 ‘회복’은 베드로가 무릎 꿇고 철저히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세에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22장 61-62절의 기록대로,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냈고, 깊이 통곡했습니다. 그 통곡은 그저 감정적으로 일시적인 슬픔을 표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패배와 연약함을 절실히 깨닫고, 자기의 의(義), 자기의 힘으로는 주님을 붙들 수 없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회개는 인간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자신의 존재와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행위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에는 자기 비움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박한 갈망이 뒤따른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의 통곡에는 바로 그 ‘절박한 갈망’이 담겨 있었고, 예수님은 그 갈망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도행전으로 넘어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성령의 능력을 입은 베드로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인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자마자 베드로는 이른바 ‘오순절 설교’를 통해 약 3천 명의 회심자를 이끌어내며,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대표적 인물이 됩니다(행 2:14-41). 그리고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를 고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행 3:1-10).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이 몰려들자 베드로는 또다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합니다(행 3:12-26). 이 일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체포해 심문하는데, 바로 그때 등장하는 대제사장들의 이름이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행 4:6). 이는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을 심문했던 그들이기도 합니다. 과거 베드로가 바로 이들의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기는커녕 밖에서 불을 쬐고 있던 중에 주님을 부인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이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 다시금 서 있는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예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라고 단언하며, 거침없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 없는 범인”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저희가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라고 합니다. 한때는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우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고 공언하며 예수의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인’과‘고백’이라는 극명한 대조를 발견합니다. 이전에는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이 곧 우리의 구원이시며, 나도 그분의 제자다”라고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 요인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확실한 체험과 성령의 임재’라고 짚어냅니다. 베드로가 인간적인 의로는 실패했지만,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낮아졌을 때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영혼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그 안에 역사하신 성령이 그를 두려움 없이 복음을 증언하는 사도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과거에는 실패했으나, 그 실패가 오히려 그를 겸손하게 하고 주님의 은혜를 절실히 붙들도록 만들었을 때, 그는 새로운 능력을 입었고 그 능력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이름이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리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의 은혜가 인간의 연약함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장재형목사가 거듭해서 말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결국 부인하던 그 자리를 떠나, 이제는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자리에까지 서게 된 것은 단순한 인간적 결심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 치라”는 말씀을 들은 뒤,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증인으로 달라진 것은 분명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베드로는 자기 안에 뿌리깊은 교만과 두려움을 회개하고, 순종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십자가 이후, 부활 이후,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그는 확실하게 자기 신앙의 토대를 예수님께 두었고, 더 이상 인간적 가오(허세)나 자기 확신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나는 또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라는 자세로 섰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베드로의 부인’ 같은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 속에서, 심지어는 가족 안에서도, 예수님을 인정하기 부담스럽거나 두려운 상황을 접하게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 안에서, 때로는 종교적 편견이나 무신론적 분위기가 강할 때, 혹은 우리의 약점이나 실수가 드러날까 두려울 때, 우리는 “나는 그와 상관이 없다”고 도망칠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요한복음 18장의 베드로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아니요”라고 부인하다가 닭 울음소리를 들은 뒤 밖에 나가 통곡하던 베드로,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 미리 그를 위해 기도해주셨던 사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우리를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합니다. 나아가 사도행전 4장의 베드로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똑같은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 섰음에도, 이제는 “우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선포하는 담대함, 그리고 주께서 주신 구원의 이름이 오직 예수뿐임을 증거하는 믿음. 그 모습이야말로 베드로의 회복된 자아이자, 성령 충만의 열매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이 변화를 두고 “고난 전후의 베드로, 부인 전후의 베드로, 성령 체험 전후의 베드로, 이 세 장면을 비교해 보면, 신앙의 핵심은 결국 ‘나 자신의 의(義)’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체득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베드로가‘극단의 실패’를 경험했기에, 나중에는 더 큰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사도행전 내내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에서도 중요한 발언을 하고, 이방인 고넬료 사건(행 10장)을 통해 복음이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는 초석을 놓는 장면 등에서 그의 영향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만약 베드로가 실패 없이 줄곧 순탄하게만 살았다면, 과연 그가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깊이 공감하고, 또 은혜의 절대적 가치를 그렇게나 절실히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한때 수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달았기에, 이후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능력’만이 자신을 붙들어줄 수 있음을 명확히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베드로가 다른 이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크고도 깊었습니다. 그는 통곡의 시간이 지난 뒤 자기를 완전히 낮추는 과정을 거쳐, 열두 제자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형제들을 믿음 위에 세우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베드로는 종종 ‘수제자’로 불리며 사도들의 리더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수제자’라는 칭호 뒤에는 한때 세 번 부인했다는 뼈아픈 과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실패로 인해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더 크게 체험했기에, 베드로는 다시금 일어서서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선포하는 참된 증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실패하고, “닭 울은 뒤” 통곡하며 다시 예수님께 돌아온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에 주어진 교훈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거나, 혹은 신앙적으로 크게 실패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베드로의 이야기는 분명히 희망을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실패를 벌주거나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돌이키는 자에게는 항상 더 큰 사명과 영광으로 인도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 약속의 핵심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하나님은 실패를 낭비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다시 붙들리기만 한다면, 그 실패조차도 훗날 더 풍성한 열매와 간증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자기 죄책감만 담은 것이 아니라, 이후에 이 땅의 수많은 죄인들에게 “너도 회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준 역사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 순간 ‘부인할 것인가, 증언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작은 일상에서부터 큰 고난의 현장까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때론 우리의 체면이나 안전을 이유로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인하는 행동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수님이 아셨음에도 끝까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당부하신 그 사랑과 은혜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동일한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 앞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서, 정말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여기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단지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목회하는 일부의 사역자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살아가는 현장마다, 하나님은 돌보아야 할 영혼들을 우리 곁에 허락하십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혹은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보살피고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사명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맡겨진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증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도망치는 태도는 우리의 사역과 간증을 무너뜨립니다. 반면 사도행전 4장의 베드로처럼, “우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는 담대한 고백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의 통로가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여전히 연약함이 남아 있고,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언제든 또 다른 형태의 ‘부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는 명령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실 때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거나, 심문당하는 예수님 곁을 바로 지키지 못했던 일, 그리고 주님을 부인한 사건 모두 ‘기도하지 못함’과 ‘자기의 의지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영적 전쟁의 실상은 우리의 일상 속에 매우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상황의 급변 앞에서 주님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깨어 기도한다면, 사단이 밀 까부르듯 흔들어도, 주님께서 도우셔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튼튼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역설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새벽’이라는 상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닭이 울면서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빛이 임박하는 그 시점에, 베드로의 과오가 폭로되었고, 그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외면했음을 통감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통곡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통곡을 통해 베드로 안에서 새로운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부인했으니, 주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세울 기회도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스스로 그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결국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며 그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종종 ‘칠흑 같은 어둠’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이 가장 짙을 때, 사실은 새벽이 가장 가까운 때이기도 합니다. 닭이 울면 어둠이 거치고, 아침이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만 더 버텼다면,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뭔가 더 멋진 고백을 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무너졌고, 그 무너짐이 자신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직시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회복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온전히 누린 사람은 자기 과거의 실패를 발판 삼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겸손하고도 강력한 도구로 쓰임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늘상 말하듯, “실패는 끝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물론 무조건 실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실패했을 때 스스로를 정죄하며 주저앉기보다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돌이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베드로가 겪었던 통곡의 시간 이후의 놀라운 영적 성장과,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가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그는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지만(행 4:13), 오히려 그러하기에 자신의 능력이나 자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붙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게 된 사람은, 설령 과거에 어떤 부끄러운 실패가 있었다 해도, 조금도 주저함 없이 진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는 고백은, 이제 더 이상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거나, 사회적 평판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심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안전하다”(잠 29:25)는 진리를 몸소 체득한 모습입니다.
우리 또한 이 베드로의 모습에서 큰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한번이라도 주님을 부인했을지라도, 혹은 수없이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지라도, 진심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단지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내 양을 먹이라’는 큰 책임까지 우리에게 맡기신다는 사실이 복음의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한때 주님을 버렸던 제자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위임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신뢰가, 우리가 믿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이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토록 부끄러운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다시 찾아오셔서 사명을 맡기시고, 성령을 통해 권능을 부어주셨다는 점이야말로, 인간의 실패를 전혀 낭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정리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베드로처럼 두려움과 환경적 압박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거나, 혹은 신앙의 고백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혹시 ‘불을 쬐는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너도 교회 다니니? 너도 예수 믿니?”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 나는 아니야. 별로 열심히 믿는 거 아니야”라고 대답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렇게 믿음의 증언을 회피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 죄책감과 영적 침체가 찾아옵니다. 게다가 영적으로 볼 때, 사단은 우리가 신앙을 부끄러워하도록 계속해서 유혹합니다. “네가 예수를 증거하다가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면 어떡하냐?”, “학교나 사회에서 놀림을 받거나 배척당하면 어떡하냐?”, “너 스스로도 신앙이 확고하지 않으면서, 누굴 전도한다는 말이냐?” 등등,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음성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베드로도 넘어졌지만, 그를 다시 세우신 분이 예수님이셨고, 지금도 그 예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에서 끝나지 말고, 우리가 실제로 믿음으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는 완벽한 성자들만 모인 곳이 아니라, 실패했던 죄인들이 회복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라고 자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베드로 같은 이들’이 모여서 서로 격려하고, 주님의 은혜를 나누는 곳입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고, 그 넘어짐 때문에 통곡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금 우리가 영적 침체에 빠져 있거나, 어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혹은 아직도 “나는 아닌데…”라며 주님을 본의 아니게 부인하고 있다면, 바로 이 순간에 회개하며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닭 울기 전에나 닭 울은 뒤에도 베드로를 기억하시던 주님이, 지금도 우리의 인생 한가운데서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합니다.
끝으로, 베드로의 통곡은 결코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통곡은 구원의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철저히 깨닫게 된 이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을 통해 베드로는 다시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내 양을 먹이라’라는 사명을 감당할 만큼 준비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며, 우리가 그 실패를 진심으로 아파하며 회개할 때, 더 큰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시 어둠의 시간을 지나는 것 같고, “너도 예수의 제자냐?”라는 질문을 받는 것이 겁나서 도망치고 싶어진다면, 도망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곧 닭이 울 때, 우리는 통곡의 자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통곡이 회개와 새 소망으로 이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회복의 은혜로 인해, 부끄럽지만 여전히 고백할 수 있는 고백,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그 고백을 통해, 주님은 우리를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되게 하시고,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배우는 궁극적인 결론입니다. ‘부인에서 고백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회복으로’ 이어진 베드로의 여정이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예수님을 온전히 붙들 때 그 회복의 길은 지금도 열려 있으며, 그 길의 끝은 부끄러운 과거의 쇠사슬에 묶여 사는 인생이 아니라,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