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에서도 진보하는 복음과 바울의 태도 – 장재형목사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 바울 사도는 옥중에 있으면서도 “그러면 무엇이뇨?”라고 반문한 뒤, 복음 전파 동기가 어떻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사실 자체로 기뻐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옥중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복음이 여전히 진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장면이며, 동시에 바울을 괴롭히는 이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복음 중심적 태도를 견지하는 그의 영적 깊이를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옥중서신 강해를 통해 이 본문을 해설하며, 현대 성도들에게 복음 중심적 신앙, 넓은 시각,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는 물음을 통해, 교회 안에 갈등과 시기가 있어도, 그런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복음이 전파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라고 제안한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흔들림 없이 복음 진보를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역사의 흐름에 대한 확고한 믿음 덕분이다. 이 믿음은 바울로 하여금 삶과 죽음, 인간적 욕망과 시기심을 뛰어넘어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데 집중하게 했다.

이 글은 바울의 옥중 상황, 복음 진보의 역설,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이용하는 이들에 대한 바울의 반응, 그리고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목사의 해설을 통해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또한 헤겔의 철학, 천국 비유(마 13장), 삶과 죽음의 초월, 그리고 프로비던스(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를 포함해, 현대 성도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통합적으로 조명한다.

1. 옥중 상황 속에서 드러난 복음 진보의 역설: 장재형목사의 관점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오히려 복음이 진보했다고 말한다(빌 1:12-14).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전도자가 자유롭게 활동해야 복음 전파가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시위대와 방문객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로써 전혀 예기치 못한 청중이 복음을 듣게 되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결박 소식에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함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복음이 결코 환경에 매이지 않고 확장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는 원리로 정리한다. 인간적 제약, 제도적 제한, 물리적 억압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롭게 역사한다. 바울의 옥중 상황은 복음이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여 확장되는 광경을 제시하며, 성도들에게 환경을 탓하기보다 그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으라고 촉구한다. 이는 복음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섭리 아래 역사함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2. 바울을 괴롭히는 이들의 존재: 교회 내부의 불순한 동기

그러나 복음 진보의 희망찬 이야기 뒤에는 바울을 괴롭히는 또 다른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빌립보서 1장 15-17절에서 바울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들을 언급한다. 이들은 바울의 옥중 상황을 악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고, 바울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려 한다. 복음 전파라는 명분 뒤에 숨은 시기심과 경쟁심이 작동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 내부에도 인간적 욕망과 갈등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초대교회라고 해도 완전한 공동체는 아니었다. 복음을 도구화하여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는 사람들, 시기심과 질투로 바울을 괴롭히는 이들의 존재는 교회가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성도들이 교회 생활에서 이상향만을 기대하기보다, 현실적 갈등과 불순한 동기도 직면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3.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바울의 반응과 하나님 주권에 대한 신뢰

바울은 이러한 불순한 동기를 감지하고도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말한다(빌 1:18). 이는 불순한 동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결정적 선언이다. 설령 시기심으로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리스도가 알려지고 전해진다면 바울은 기뻐하겠다고 한다. 이 태도는 바울이 자신의 감정이나 명예보다 복음의 진보를 우선시하는 복음 중심적 신앙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갈등이나 어려움 속에서 마음이 쉽게 좁아질 수 있다. 인간적인 감정의 격동, 불확실한 미래, 교회 내부의 분열, 불순한 동기와 이기심,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압박과 핍박은 성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럴 때마다 성도들은 바울 사도의 예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 갇혀 있었고, 자신을 괴롭히는 불순한 동기의 전도자들이 있는 현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매몰되지 않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묻는 넓은 시선을 가졌다. 이 질문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인간적 문제를 상대화하는 신앙적 결단을 의미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현대 성도들의 상황에 대입해보자.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고, 서로를 비방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거나, 교회 사역을 정략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외부 환경 또한 편하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 편견, 법적 제약, 세속 문화의 반감이 성도들을 괴롭게 하며, 어떤 이들은 신앙의 자유가 제약되는 현실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 이런 복합적 어려움 속에서 성도들은 마음을 잃기 쉽고, 감정적 반응이나 극단적 태도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바울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는 물음은,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 초점을 재정립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우선, 장재형목는 이 질문이 복음의 절대적 가치를 환기시킨다. 시기와 분쟁, 불순한 동기가 넘쳐나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사실 자체는 변함없는 기쁨의 원천이다. 이 기쁨은 인간적 문제를 초월하며,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헌신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자 구원에 이르는 길이며(롬 1:16),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서 어떤 장애물도 복음 전파를 완전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질문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대한 믿음을 상기하게 한다. 불순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설령 일시적으로 교회 분위기를 어지럽히고, 외부 환경이 복음 사역에 장애물을 놓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주권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행 17:26-27), 그분의 절대 주권 아래서는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복음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 이 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단기적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더 큰 그림을 보게 한다.

셋째, 이 질문은 성도들의 내면적 태도를 변화시킨다. 복음 중심적 시각을 갖게 되면, 성도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이익, 명예보다 복음 확장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불순한 동기나 교회 갈등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복음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재인식할 때, 그 문제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분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곧 성도들이 더 넓은 마음, 바다 같은 마음을 품게 하고, 갈등 속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용서하는 태도로 나아가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는 질문은 성도들로 하여금 실천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한 교회 내에서 사역자가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한다는 소문이 돌거나, 외부에서 전도 활동을 가로막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보자. 이때 성도들은 분노나 절망 대신, 복음 전파에 더욱 힘쓸 수 있다. 물리적 제약이 있다면 디지털 미디어나 SNS를 통해 복음을 나누고, 문화적 장벽이 있다면 언어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며 복음을 창의적으로 전달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상황이 어렵고 마음이 좁아질 때,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물어봄으로써 성도들은 복음 전파 방법과 전략을 재조정하며, 결국 복음이 전파되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다.

요약하자면, 현대 성도들이 마음이 좁아지고 신앙 초점이 흐려질 때마다, 바울의 예를 떠올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행위는 매우 유용하다. 이 질문은 불순한 동기, 교회 갈등, 환난과 핍박이라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는 사실 자체가 기쁨의 원천임을 되새기게 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대한 굳은 믿음 아래 흔들림 없이 복음 사역에 전념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성도들은 바울의 태도를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중심의 신앙을 유지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다.

4. 삶과 죽음, 천국 비유, 넓은 시각: 바울 가치관의 전환과 현대 성도에의 적용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옥중에서도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신앙 자세를 지녔음을 지적한다(빌 1:20-21).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소망했고, 죽음까지도 유익하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가 분명했기에,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교회 갈등은 바울에게 절대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울의 삶의 전부는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일들은 그 큰 흐름 안에서 부차적으로 여겨졌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천국 비유를 말씀하실 때,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계시고 무리들은 서 있었다. 이 광경을 비유로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광활한 바다와 같고, 복음 중심적 신앙은 이러한 넓은 배경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라고 강조한다. 때로 우리의 마음이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쪼그라들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프로비던스를 믿을 때 시야가 넓어진다. 바울은 역사의 큰 그림을 본 사람이었고, 그 안에서 인간적 갈등과 시기심은 궁극적 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현대 성도들은 종종 세속적 성공, 편안함, 눈앞의 이익에 매여 마음이 좁아질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보여준 태도—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진보를 바라보며, 불순한 동기에도 무너지지 않는 자세—는 성도들에게 넓은 시각을 유지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믿음, 역사 안에 펼쳐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온다.

5. 현대 교회를 위한 적용: 복음 중심적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 해설을 통해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복음 중심적 신앙을 확립할 것을 촉구한다. 오늘날 교회에도 다양한 문제와 갈등, 불순한 동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는 바울의 반문을 기억한다면, 성도들은 복음 전파라는 궁극적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상황을 초월하는 신앙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몇 가지 실천적 교훈을 준다. 첫째, 복음을 최우선 가치로 삼을 때 개인적 감정이나 명예 문제에 묶이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신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유지하게 한다. 셋째,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시각을 가질 때, 불순한 동기나 세속적 갈등은 궁극적 중요성을 상실한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갖고, 갈등 속에서도 복음을 전진시키는 일에 힘쓸 수 있다.

바울은 죽음이 임박할 수도 있는 옥중 상황에서조차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고 고백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낙관을 넘어,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배경으로 한다. 성도들은 이 믿음을 본받아, 불완전한 공동체와 갈등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전념할 수 있다.

결론: 바울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를 통한 복음 중심 신앙 확립

본 논의에서는 바울이 옥중에 있음에도 복음의 진보를 경험한 역설적 상황과, 그를 괴롭히는 불순한 동기의 전도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울은 이 모든 현실을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정리한다. 이는 불순한 동기나 시기심이라는 인간적 약점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으로 복음 전파라는 더 큰 목표에 시선을 고정한 태도다.

장재형목사의 옥중 서신 강해에 따르면, 바울의 이러한 시각은 복음 중심적 신앙,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가치관, 그리고 넓은 마음을 갖추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교회가 갈등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고, 하나님 주권 아래 역사가 진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성도들이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복음에 초점을 맞출 때, 교회는 비로소 혼란스러운 상황을 넘어선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

결국 바울의 고백은 “복음이 전해지는 한, 불순한 동기나 갈등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신앙 선언이다. 성도들은 이를 통해 인간적 제약과 갈등,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를 찾으며,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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