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성령과 말씀으로 인한 깨끗함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전한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고별설교’로 알려진 이 본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요한복음 14장의 배경에서 성령의 오심과 천국 소망을 약속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이어지는15장에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선언을 통해 ‘연합’과 ‘결실’의 핵심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구절이 신앙생활의 절대적 원리임을 되풀이해 전한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유언처럼’ 남기신 최후의 가르침이니만큼, 우리가 얼마나 말씀 안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하는지가 담겨 있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그러나 이 결실의 비결은 단순히 땀 흘려 노력하는 것으로만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대로, 우리가 깨끗해져야 결실이 가능하다는 점이 요한복음 15장 2절과 3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대표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신앙의 훈련은 우리의 내면과 삶을 깨끗하게 하는 훈련”이라고 강조한다. 즉,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은 연합과 결실이지만, 전제 조건은 죄로 인한 더러움을 씻고 내면을 성결케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디모데후서 2장의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주인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깨끗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또 요한일서 5장 7~8절을 언급하며, “물을 통해 씻음 받고, 피로 인한 속죄와 생명을 얻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 깨끗케 된다”는 점을 짚어낸다.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를 이룬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 세 요소가 본질적으로 우리를 씻어 결실케 하는 근원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더욱이 창세기 49장의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면서 “포도주로 옷을 빨아라” 하고 예언한 것, 그리고 계시록 22장에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선포가 결국 같은 뿌리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포도주’는 성령을 상징하고, 그래서 우리의 두루마기(곧 삶과 행실)를 씻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구약과 신약 전체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 안에 거한다 하면서도 세상의 온갖 유혹과 죄악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씻기지 않으면,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삯꾼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고, 또 중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복음의 희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을 뼈아프게 짚는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교회 공동체가 소망 중에 성령을 맞이하며 이 땅에서 힘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증해 주시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좋은 것을 세상 사람들이 왜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하면, 정작 교회가 제대로 전하지 못했고, 깨끗함을 유지하지 못해 전도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생생하게 전한다면,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감동을 받고 크게 변화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출발점이 우리의 회개와 깨끗함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선언은, 세상의 방식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오직 주 안에서 깨끗해져야 한다는 결론을 재차 환기한다.
그러면서 장재형목사는 솔로몬의 예화를 든다. 다윗의 아들로서 지혜와 영광의 절정에 섰던 솔로몬이, 어떻게 이방 여인과 혼합하여 우상숭배에 빠져 몰락했는지를 떠올려 보라는 것이다. 솔로몬의 경우가 보여주듯, 죄는 무엇보다 우상숭배와 결혼(혼인)의 문제로 드러난다. 세상과 섞이면, 불신자와 쉽게 결탁하고 그들의 문화와 가치를 그대로 수용해 버린다. 결국 하나님의 신앙이 타락에 이른다. 요한복음 15장이 말하는 결실은 깨끗해진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온전히 붙어 있어 맺히는 열매이지, 혼합주의나 세속적 혼인 관계에서 비롯된 열매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경고도 마찬가지다. 이방 문화와 결혼을 통해 죄가 들어오고, 그 죄가 성전을 더럽히며, 한때는 찬란했던 솔로몬의 영광마저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게 만들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가 결실의 시대를 맞이하려면, 더 높은 윤리 기준과 영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냥 물질의 풍요나 외형적 성장만 좇다 보면, 소위 ‘들포도’가 되는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깨끗함은 회심과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미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선언하시지만, 이것은 칭의(의롭다 함)에서 시작되어 점차 성화(거룩함)로 나아가는 긴 과정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말씀과 성령의 지속적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말씀으로 가르침받고, 성령을 통해 깨우침과 능력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늘 기억하면서 스스로 매일같이 더러워진 부분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한 번의 회개나 한 번의 견신(거듭남) 예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성결의 훈련’임을 반복해서 가르친다. 디모데후서2장 22절에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한 것처럼,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늘 주의하고, 경건한 공동체와 함께해야 한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처럼 깨끗해지기 위한 노력은 결코 개인적 자만이나 자기의(義)에 근거하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는 선포는, 우리의 힘과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이 근원임을 보여 준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고 풍요의 시대를 맞이한다 해도, 절대로 우상숭배나 세속적 혼합을 통해 세상의 길을 따라가선 안 된다. 주님이 열매 맺는 가지를‘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깨끗함은 오직 말씀과 보혈,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진리가 주 강조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핵심 신앙적 태도라며, 공동체가 커지고 사역이 확장되어도 늘 “거룩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개인과 공동체가 모두 붙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2. 풍성한 결실과 참된 연합
깨끗함이 결실의 전제 조건이라면, 요한복음 15장의 다른 축은 ‘연합’이다.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신비로운 연합(Union with Christ)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신비한 연합”이라고 부르면서도, 결코 난해한 추상적 개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해설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고백이야말로, 이 연합의 구체적 실제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고, 이제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장재형목사는 “종자개량”이라는 강렬한 비유로 설명한다. 들포도나무에는 결코 참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본래부터 죄성을 지닌 인간은 결국 메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리스도라는 참포도나무에 접붙여져야, 살아 있고 능력 있는 ‘새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접붙임의 비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유기체적 결합이라고 본다. 신학교에서 때때로 “연합의 이론이 난해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모습을 들어 쉽게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말라 버린다. 또 붙어 있더라도 세속적인 마음과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상태라면, 제대로 된 양분과 진액을 공급받을 수 없으니 풍성한 열매를 맺기 어렵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은, 단순히 교회 출석이나 종교적 의무 수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에 감전되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매일 십자가의 은혜에 젖어드는 삶을 뜻한다. 이때 장재형목사는 “진리를 알지 못하면 사랑을 알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사랑은 진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하실 때, 여기에‘사랑’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고 해서 사랑을 소홀히 다룬 것이 아니다. 진리는 곧 사랑이요, 사랑은 곧 진리이므로, 진리를 제대로 알면 참사랑을 깨닫게 되고, 참사랑을 깨달으면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논리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적인 희생이나 선행도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는 말씀에서 나타나는 아가페적 사랑, 곧 죄인을 위해 죽으신 사랑은 우리 경험과 도덕을 초월한다. 이 사랑을 입으면 사람은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바울이 감옥에서 만난 종 ‘오네시모’를 전도하여, 그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화해를 주선했던 일은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실례라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죄로 얼룩진 종이라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임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형제로 맞아들이라”는 권면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 일화들을 통해, ‘연합’과 ‘결실’은 결국 사랑 안에 거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 11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사랑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기쁨이 찾아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의 고통은 사랑을 상실했거나, 사랑이 진리와 분리되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기쁨 충만’으로 이끌고 싶어 하신다. 그것은 사랑의 열매이며, 사랑은 곧 진리에 기반을 두기에 “사랑 안에서 기쁨이 터져 나온다”는 식의 가르침을 더욱 확실히 전한다. 사람들이 왜 교회로 모여드는가? 그것은 교회에 오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참사랑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주님 안에 거한다”는 원리를 바로 이 지점에서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이 없거나, 진리의 빛이 흐릿한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 위에 서서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교회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처럼 자연스럽게 ‘생명력 있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이 연합과 결실의 세계에서는, 번영신학이나 성공주의 신앙관과 달리 “십자가를 통해 죽고 다시 사는 체험”이 필수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놓치면, 교회가 아무리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재정적으로 부유해져도 “들포도만 가득 맺히게 된다”고 경고한다. 마치 이사야서 5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극상품 포도를 심었는데 돌아온 것은 들포도뿐이라는 한탄이 현재 교회에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본어겐(중생)을 확인해야 하고, 접붙임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가지가 되었음을 스스로 인식하며, 늘 주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견신(거듭남) 날”의 중요성도 이 맥락 안에서 이해된다.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결국 맺는 열매가 “섞여 있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철저히 죽고 새 생명을 입는 ‘확실한 중생’을 경험해야 하고, 그 뒤에도 계속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결실과 연합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교회 공동체로서 갖추어야 할 구체적 태도도 함께 언급한다. 그가 예로 드는 것이 ‘C12(12개 대륙 본부)’ 사역이다. 세계선교와 교육, 도서관 건립 등 미래를 위한 다양한 기획을 진행할 때, 결국 풍성한 결실을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예로 들며 “여러분이 하려면 못하겠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어떤 것도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증거해 왔다는 점을 설명한다. 7년간 한 개의 본부를 세우는 데 고생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7개월 사이에 12개 본부가 세워진 이 놀라운 간증을 장재형목사는 신앙 공동체와 함께 나누면서, 요엘서 2장의 ‘이른 비와 늦은 비’ 예언을 상기시킨다. 초대교회는 이른 비 성령을 경험했고, 오늘날 마지막 때에 교회가 늦은 비 성령을 다시 경험하게 될 때, 폭발적 결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만 그 결실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준비된 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때 ‘주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사랑 안에, 진리 안에, 성령의 능력 안에 붙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결실이 늘어나면 반드시 진리와 윤리 문제가 함께 점검되어야 한다는 경고를 빠뜨리지 않는다. 사람이 많아지면 갈등도 많아지고, 세상적 유혹도 커진다. 공동체 내에서 권력 다툼이나 시기, 질투, 음란, 우상숭배가 들어오기 쉬운데, 이를 경계하지 않고 방치하면 교회 안에서조차 들포도가 맺히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고, 미움의 뿌리는 시기와 질투”라 말한다. 교회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그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또한 솔로몬이 이방 여인과 혼합하여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고 만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결혼 문제에서도 세상과 섞이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이는 단지 혼인 상대를 믿음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수준을 넘어, “영적 순결”을 지키는 문제라는 것이다. 얼마나 쉽게 세상의 세속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는지 역사적으로 이미 수없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장재형목사는 엘림과 F&F 같은 기관을 예로 들며, “교회가 결혼 문제를 대충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확실히 주님의 뜻과 방법 안에서 가정이 세워지고, 영적으로도 온전히 구별된 혼인이 이루어져야 교회 공동체 전체가 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연합과 결실”이라는 주님의 약속은, 한편으로 물과 피와 성령으로 깨끗해지는 성화의 과정,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주 안에 거하여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는 “사랑의 연합”을 동시에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을 잇는 고별설교의 흐름 속에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이 오실 것이라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재차 상기시키며, 성령이야말로 우리를 풍성한 결실로 이끄시는 능력의 주체라 강조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은 결국 “너희가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십자가 사랑 안에서 계속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는 확신으로, 결실의 시대를 활짝 열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 달력과 절기를 독특하게 나누어, 부활절부터 총회까지를 6개월, 그리고 총회부터 부활절까지를 또 6개월로 하여 1년을 구성하는 교회력을 예시로 든다. 부활절에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여 그 정점에 이르렀다면, 총회에서는 한 해 동안 맺은 결실을 보고한다. 이 체계를 통해 공동체가 끊임없이 예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을 붙잡고, 그 안에 거하여 실제적 열매를 내놓도록 독려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과정을 “해마다 반복할 때, 교회는 점진적으로 풍성해지고, 세계 곳곳에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늘 철저한 말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가난하고 힘들 때도 말씀을 놓치지 않았는데, 풍성해졌다고 해서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경고는 공동체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리다.
요한복음 15장이 말하는 포도나무 비유의 정수는 두 가지다. 하나는 “깨끗함”이요, 또 하나는 “연합”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가지가 자기 스스로 자란다고 착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나무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고 있을 뿐이다.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내 공로나 내 실력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성령을 통해 말씀으로 깨끗해지고 사랑 안에 거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니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으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는 가능한 일”이라고 선언하며, 믿음으로 전진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신다는 간증을 거듭 전한다. 교회가 넓어지고, 사역지가 많아지고, 재정이 풍부해지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권면이다. 결국, 그 모든 결과를 풍성하게 보고하기 위해서는 1년 365일, 7년, 14년, 21년… 이런 식으로 해가 쌓여 갈수록 더욱 순결하게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독려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오늘부터는 정말 더 깨어 있으라”고 호소한다. 작은 죄에 무심코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의 사치나 정욕에 발을 들여놓고, 욕심과 시기로 눈이 흐려지면, 그 즉시 가지가 마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그 마른 가지를 불에 던져 태워 버리듯이, 영적으로 무너져 결국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휩쓸려 버릴 수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매일같이“포도주로 빨고, 물과 피와 성령으로 씻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삶의 온갖 영역에서 들어오는 죄의 통로인 눈과 손과 입을 단속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일 네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빼 버리라”)을 다시금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조처처럼 들릴 수 있으나, 실제로는 죄의 위력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과감히 선포하신 거룩의 길이라는 해설이 뒤따른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결실의 시대를 두고 “풍성함 가운데서도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긴다. 이는 솔로몬의 역사를 떠올릴 때 절실히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예수님의 경고처럼, 교회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가진 듯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영혼이 메말라 버리면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서 5장의 들포도 대신, 요한복음 15장의 풍성한 결실을 꿈꾼다. 그리고 그 길은 이미 예수님이 직접 보여 주셨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그 해답이다. 오로지 사랑 안에 거하고, 십자가 보혈로 깨끗함을 입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활짝 열매 맺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는 것,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다.
요한복음 15장에 담긴 고별설교는 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창조적 메시지이자, 각 성도가 매일 듣고 살아야 할 생명의 말씀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더욱 크게 울린다. 세상은 진리 따윈 없다고 하면서, 동성애와 낙태 문제, 상대주의 윤리, 물질만능주의 등 각종 가치의 혼란이 만연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 길 안에 거하면 기쁨이 충만하며, 생명이 약동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영적 실체를 잃지 않는다면, 앞으로 7개월이든 7년이든, 153개든, “주님께서 이루라고 하시면 능히 될 것”이라 선포한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우리는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매 순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해졌으니”라는 구절을 잊지 말되, 동시에 매일 더러움이 들어오지 않도록 옷을 빨고 자기를 성결케 해야 한다는 경계도 놓쳐서는 안 된다.
결실은 단지 세상의 기준으로 말하는 ‘결과물’이 아니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말하는 바, 가장 큰 결실은 ‘영혼 구원’이다. 전도가 결실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교회가 무엇을 자랑하겠는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을 살리고, 그 복음을 전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최고의 열매라는 결론이다. 이 결실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먼저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하고, 교회가 그 사랑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사랑 이야기”가 온전히 증거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생명이 꿈틀거린다.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 품으로 돌아오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그것이 하나님이 농부이시고, 예수님이 참포도나무가 되셔서, 우리가 가지로 부름받은 궁극적 이유다.
이상으로 요한복음 15장에 관한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를 정리하면, “우리는 물과 피와 성령으로 깨끗해지고,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연합해야 하며, 그때 비로소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실을 많이 맺을수록, 교회 안팎에서의 유혹이나 혼합주의 위험도 커지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 철저히 십자가 보혈을 붙잡고 회개와 자복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은, 결국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 능력의 절대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각 사람과 공동체를 포도나무 가지로 세워, 성령의 역사를 통해 멀리 열방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하고 계신다고 장재형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그가 언급하는 C12나 153개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상도, 어떤 거창한 프로젝트 그 자체를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일어나는 ‘결실의 확장’을 간증함으로써, 모든 성도가 동일한 소망을 품고 주님 앞에 헌신하기를 바라는 호소다.
신앙생활은 ‘나무’ 되시는 주님께 ‘가지’인 우리가 하루하루 붙어 있는 장면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깨끗함이 없이는 결실이 불가능하고, 사랑의 연합이 없이는 지속적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진리를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항상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을 기념하고 되새기면서, 이 선순환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교회가 영원토록 붙들고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언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