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옥중에서도 진보하는 복음과 바울

장재형목사는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 그가 던지는 “그러면 무엇이뇨?”라는 질문은 체념도 아니고, 현실을 애써 긍정하는 낙관도 아니고 말한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복음 자체는 결코 묶이지 않았다. 그것은 복음이 인간의 이해관계나 통제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스스로 길을 내며 움직인다는 확신에서 흘러나온 자유의 언어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는 옥중서신을 강해하며, 이 짧은 반문에 담긴 시야의 넓이를 오늘의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신앙은 종종 상황과 분위기, 타인의 평가에 의해 좌우되지만, 바울의 시선은 감옥의 벽을 넘어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는 방향으로 향한다. 그래서 그는 전도의 동기를 둘러싼 논쟁보다, 결과로서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쁨의 근거로 삼는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순간적인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복음의 우선순위가 빚어낸 신학적 결단이다. 우리는 빌립보서를 읽을 때 ‘옥중’이라는 배경을 쉽게 장식처럼 넘기지만, 장재형목사가 지적하듯 감옥은 인간의 능력이 철저히 한계를 드러내는 자리이자, 하나님의 섭리가 예상 밖의 방식으로 펼쳐지는 무대다. 바울은 로마의 감시 아래 있었고, 이동도 전략도 제한받았지만, 그 제약 속에서 그를 지키는 이들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 결과는 공동체의 위축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함의 확산이었다. 이는 복음의 진보가 인간의 활동성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두신 통로를 알아보는 영적 분별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는 선언을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이 말은 감옥이라는 특수한 환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제도가 막혔다, 여론이 냉담하다, 관계가 깨졌다, 교회 내부의 갈등이 깊다고 말하며 복음의 전진도 함께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결박은 복음의 결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슬은 복음이 낯선 청중에게 닿는 통로가 되었고, 공동체의 믿음을 단단히 세우는 자극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자리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역사한다는 것이 옥중서신이 품은 깊은 문법이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을 더욱 예리하게 찔렀던 것은 환경의 제약보다 교회 안에서 드러난 불순한 동기였다. 빌립보서 1장 15–17절이 말하듯, 어떤 이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다. 복음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내면에는 경쟁과 과시,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울이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그 빈자리를 기회 삼아 자신을 드러내려 했고, 심지어 바울의 고통을 더하려는 마음까지 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교회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초대교회조차 순수한 동기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오늘의 교회가 갈등과 시기심을 겪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더 깊은 치유와 성숙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바울의 위대함은 갈등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갈등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의 “그러면 무엇이뇨?”는 불순한 동기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목적 앞에서 인간의 동기를 상대화하는 영적 선택이다. 바울은 자신의 명예나 평판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가장 궁극적인 가치로 두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의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 의도에 감정적으로 사로잡히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넓은 시각’이란, 바로 이 포획에서 벗어나는 자유다. 좁은 시각은 모든 사건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지만, 넓은 시각은 사건을 하나님의 큰 이야기 속에 배치하며 복음의 진보를 중심에 둔다.

이러한 태도의 근원에는 바울의 하나님 이해가 있다. 하나님은 단지 위로를 주는 분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주권과 섭리를 이론으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감옥이라는 물리적 제한과 교회 내부의 심리적 공격 속에서 삶으로 증명했다고 해석한다. 바울은 자신의 결박이 헛되지 않음을 알았고, 심지어 타인의 왜곡된 동기조차도 하나님이 뜻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급진적인 신뢰로 버텼다. 이는 복음의 진보가 좋은 조건이 모여 생겨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설을 통해 길을 여시는 사건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민감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불순한 동기로 전해진 복음도 선이 될 수 있는가. 바울은 그 동기를 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악한 의도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알리시는 결과를 만들어내실 수 있음을 고백할 뿐이다. 이는 윤리적 무감각이 아니라 섭리 신앙의 균형이다. 우리는 동기를 정결하게 하도록 부름받았지만, 우리의 실패와 타인의 왜곡, 공동체의 혼탁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균형을 붙들라고 말한다.

이 바울의 태도는 오늘의 교회가 갈등을 대하는 지혜가 된다. 현대 교회는 사역의 열매를 비교하고 영향력을 경쟁하며, 인정에 민감해지기 쉽다. 어떤 이는 순수한 열정으로 사역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자기 확장의 수단으로 삼는다. 이때 바울의 반문은 우리를 향해 묻는다. “지금 내가 붙든 분노와 억울함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는 일보다 더 중요한가.”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이 성도의 마음을 좁히는 ‘사소한 절대화’를 무너뜨린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의 “살든지 죽든지”라는 고백은 이 모든 태도의 토대다. 바울에게 삶은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고, 죽음 또한 파멸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절대가 될 때, 삶은 도구가 되고 죽음은 문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가치관의 전환이라 부른다. 이 전환이 있었기에 바울은 감옥도, 시기심도, 갈등도 최종 실재로 여기지 않았다.

결국 바울의 옥중 태도는 복음이 인간의 명예와 조건을 넘어서는 기쁜 소식임을 증언한다. 복음은 사람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진보는 우리의 유리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서 시작된다. 장재형목사가 빌립보서 1장을 통해 오늘의 성도에게 전하는 권면은 분명하다. 상황이 불리해도 복음의 길을 찾으라. 동기가 혼탁해 보여도 복음의 기쁨을 놓치지 말라. 갈등이 현실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라. 이 권면은 오늘의 교회가 다시 넓은 시야를 회복하게 하고, 작은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바다 같은 믿음으로 복음을 살아내게 한다.

컴앤씨

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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