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악한 권세와 영적 각성 – 장재형목사

1. 포악한 헤롯 왕의 시대와 베들레헴의 의미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사순절 묵상집에서 설교한 마태복음 2장은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이 한 문장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매우 깊은 역사적·영적 함의가 숨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셨던 시점은, 헤롯이라는 포악하고 사악한 왕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헤롯은 힘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죽을 때 백성이 기뻐 뛰고 웃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죽는 날에 백성의 존경을 받는 이들을 함께 죽이라고 유언까지 했던 자였습니다. 또한 유대 공회(산헤드린)의 법관들 수백 명을 죽였다는 전승이 전해지고, 자기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의심이 가면 가차 없이 처단하는 등 극도의 잔혹성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가짜 왕’이 지배하고 있던 시기가 바로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였고, 마태는 이 어두운 배경 위에 예수 탄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교차시키며, 구원자 되신 분의 탄생이 결코 평온하고 낭만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이 시대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보면, 유대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는 여러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는 총독을 보내 통치하게 했고, 또 다른 지역에는 꼭두각시와 같은 왕을 세워 간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얼마 전부터 로마 제국의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유대)을 통치했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뛰어난 책략가였으나 동시에 대단히 폭력적이고 잔인했습니다. 그가 병에 걸려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백성이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기뻐 뛰는 상황을 막으려고 여러 명의 유력자, 특히 사랑받는 이들을 함께 죽이라고 했던 일화는 그의 잔인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이야기는 전해 내려오는 여러 기록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심지어 사도행전12장에서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고 하여, 헤롯 왕가(특히 헤롯 안티파스, 헤롯 아그립바 등으로 이어지는)와 관련된 비참한 최후를 전하는데,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하는“헤롯 왕”은 그 왕가 계보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인물로 기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죽음과 공포가 난무하는 시대, 가짜 왕이 지배하던 그 어두운 현장에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크리스마스를 낭만적인 분위기의 축제, 기쁜 캐럴과 아름다운 불빛, 따뜻한 선물 교환 등으로 기억하지만, 본문이 보여주는 상황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마태는 거친 시대적 배경을 깔아 놓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구원의 빛이 더더욱 분명히 드러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유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베들레헴은 단순히 시골 마을이라기보다, 다윗 왕의 혈통과 관련된 상징성을 띤 ‘다윗의 동네(City of David)’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기대는 이미 구약의 여러 예언을 통해 공고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다윗이 태어난 곳’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동시에, ‘작고도 미미한’ 시골 마을이라는 점에서 역설적 메시지를 줍니다. 곧 메시아 왕이 오실 때, 세상이 주목하는 대도시나 권력이 집중된 화려한 궁전이 아닌, 가장 낮고 소외된 자리에서 태어나심으로써 성육신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베들레헴(Bethlehem)’이라는 지명의 뜻이 ‘떡집(House of Bread)’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셨습니다(“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이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사실은 매우 ‘계시적’입니다. 즉, 하늘 양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께서 상징적으로도 “떡집”에서 나셨다는 것이죠.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섬세한 준비를 시사합니다.

본문에서 강조되는 또 한 가지 표현은 “나시매”입니다.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했을 때,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위 어떤 추상적이고 영적인 존재로만 존재하시다가 한순간에 ‘구름 타고’ 임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속 특정 장소와 특정 시점에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니엘 7장 등에 근거하여, 메시아가 하늘 구름 타고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는데(물론 종말론적 측면에서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더 분명히 실현될 모습이기도 합니다), 정작 초림 때에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의 아들, 한 아기로 태어났다는 점이 충격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록함으로써, 메시아 탄생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실을 처음 감지한 자들은 다름 아닌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유대 땅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 율법 교사들이 아니라, ‘이방 땅’에서 별을 관찰하던 박사들(Magi)이 예수의 탄생을 먼저 알아차린 것입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 2:2)라는 동방 박사들의 고백은, 당시 종교적 정통성을 자부하던 유대 지도자들보다도 오히려 이방인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먼저 인식하고 그를 경배하러 달려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태복음 2장이 우리에게 주는 통렬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런 감지조차 못했는가?” 이 질문이 곧,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던져집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신학 지식이 많고, 여러 신앙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정작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영적 침체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를 본문이 주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점성술사 혹은 별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늘의 표적을 민감하게 살폈고, 자신들의 관찰이 보여 준 이상 징후를 통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신앙인이 아닌 이들에게서 이러한 경외심과 탐구심이 발현된 것은, 역설적으로 선민의 무지와 무관심, 영적 둔감함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마태는 이런 대조를 통해 당시 유대인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고발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낭만적으로만 접근하면, “아기 예수” “동방박사의 예물” “들에 사는 목자들” 등 따스한 이미지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 배경에 도사린 죽음의 공포, 폭력, 정치적 음모, 그리고 ‘영적 어두움’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사실 이 사건이 얼마나 어둡고 부패된 세상 한가운데서 펼쳐진 구원의 드라마인가를 보여 줍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본문을 종종 설교하면서, “낭만적 분위기만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이고 치열한 영적 전쟁 한가운데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이 전혀 평온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 한복판에 친히 들어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희망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의 의미를 묵상해 보면, 그곳이 ‘다윗의 동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떡집(House of Bread)’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징이 매우 강렬합니다. 사람의 육체적 허기는 떡이나 양식을 통해 해소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굶주린 인류는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배부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 존재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굶주림을 채우러 이 땅에 임하셨음을 선언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역설적으로, 그 베들레헴은 당시 세상 권력자들의 시선에서 볼 때는 하찮고 작은 고을이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미가 5:2)라는 말씀의 예언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항상 세상의 논리와 다른 곳에서 진행됩니다. 이처럼 역설적이고 겸손한 방식으로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그 시작부터 낮은 데서 출발해 점차 퍼져 나가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서 가장 크게 기뻐하고 이를 바로 인지한 자들이 의외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복음은 이스라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 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2장 1절의 짧은 문구가 보여 주는 헤롯의 잔혹함과 베들레헴의 상징성, 그리고 “나시매”라는 표현의 역사적 사실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인지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거짓 왕과 진정한 왕의 대비, 강함을 과시하는 세계 권력과 약함으로 오신 메시아의 대비, 그리고 영적으로 눈이 감긴 선민과 깨달음을 얻은 이방인의 대비 등, 모든 요소가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가 2장을 통해 의도적으로 전개하는‘역설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포악한 치리자로 상징되는 어두운 권세와, 겸손하게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의 대조를 통한 거룩한 충돌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없이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러한 낮아짐으로 오히려 죄의 권세와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히 한 번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각 사람의 삶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임하여, 교만과 어둠을 깨뜨린다는 구원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은 우리에게 묵직한 도전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왕을 따라가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라 자처하는 가짜 왕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참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께 우리 영혼의 순종을 드리고 있는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성탄 시즌의 낭만을 넘어, 믿는 이들의 심령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헤롯의 폭정 속에서도 하나님 계획이 결코 가로막히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났음을 기억할 때, 어떠한 시대적 어둠과 인간적인 절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2. 동방박사, 영적 각성,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훈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2절로 넘어가면, 동방박사들의 등장이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박사들은 헬라어로 ‘마고이(Magi)’라 불리는 인물들로, 주로 바빌론, 페르시아 등 동방 지역에서 별을 관찰하고 천문학이나 점성술을 연구하던 자들이라고 추정됩니다. 학자들 간에는 그들의 정확한 출신이나 학문적 배경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들은 유대 전통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었고, 별을 통해 미래 혹은 왕의 탄생과 같은 중대한 사건을 엿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그들이 ‘단지 별을 헤아리는 점성술사’에 그치지 않고, 별에서 나타난 징후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실제로 그 별이 가리키는 인물을 찾아 수많은 위험과 불편함을 감수하며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행동에는 ‘경배하러 왔노라’는 신앙적(혹은 종교적) 태도가 드러납니다. 이는 마태복음이 전체적으로 보여 주려는 중요한 메시지, 곧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는 구원의 길, 그리고 이방인의 믿음이 오히려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무지와 교만함을 책망한다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을 때, 헤롯은 이 말에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전체가 함께 소동했다고 기록됩니다(마 2:3). 이 소동의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치적 위협으로 인한 소동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은 곧 왕권을 의미하므로, 헤롯이 자신의 왕위가 흔들릴까 두려워했던 것이죠. 둘째, 영적 둔감함과 불신으로 인한 소동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정작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는 이야기를 갑작스레 들은 이들이 동요하고 혼란스러워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율법과 예언을 배워 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동방박사들처럼 ‘실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탄생 당시, 이들은 헤롯의 부름을 받아 미가 5장의 예언을 다시 확인하고, 분명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발걸음을 옮겨 실제로 메시아를 찾아가거나 경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방 땅에서 별의 표적을 본 박사들은 기꺼이 긴 여정을 떠났습니다. 이 대조가 마태복음 2장의 핵심적 장면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며, 수많은 신학적 지식을 쌓으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순종의 여정’을 감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다”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그 왕에게 경배하고 순종하려는 움직임 없이 신앙생활을 관성적으로 해나갈 위험이 존재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이 점에서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매우 도전적인 본보기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화권과 종교적 배경을 넘어서, 새롭게 열린 진리를 붙잡으려는 열망과 결단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방박사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계시가 어디에서나 임할 수 있으며, 그 계시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움직이는 자가 참된 경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선민이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음을 놓치고 있을 때, 그들은 별 하나의 움직임을 따라 수백 킬로미터를 넘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장면을 두고, “중요한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영적 감각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용기다”라고 설파해 왔습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도 말로는 신앙을 고백하나, 실제로는 세상의 권세와 타협하고, 혹은 익숙한 종교적 형식을 지키는 데만 집중하는 모습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방박사들이 보여 준 헌신의 길이 진정한 신앙인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박사들은 마침내 베들레헴으로 내려가 예수님께 경배했으며, 황금과 유황과 몰약이라는 예물을 드렸습니다(마 2:11). 이 선물들은 각각 왕권, 신성(제사장적 의미), 그리고 죽음을 예비하는 의미로 해석되곤 합니다. 황금은 예수님께서 참 왕이심을, 유황(또는 유향)은 거룩한 분이심을, 몰약은 십자가 죽음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유대인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훗날 예수님께서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고 선포하실, 보편적 구원의 기초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 “헤롯”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의 권력, 폭력, 두려움,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유지하려는 집착입니다. 헤롯은 처음에는 동방박사들을 통해 ‘메시아의 탄생지’를 알아낸 뒤, “나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마 2:8). 이는 세상 권력이 얼마나 거짓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참 왕’을 배척하려 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실제로 헤롯은 나중에 이 음모가 좌절되자,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마 2:16). 그리하여 베들레헴에서 “라헬이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크게 통곡하였다”는 구약 예언(렘 31:15 참조)이 성취되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침묵 혹은 방관도 주목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우리가 그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말했을 때, 유대 지도자들은 학문적·종교적 지식으로는 미가서의 예언을 찾아냄으로써 일종의 ‘정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답은 그들의 발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미 충분히 율법과 예언을 배웠다고 생각하던 교만이 그들을 영적 무감각 상태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마태는 상기시킵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점을 여러 설교와 저서에서 비중 있게 다뤄 왔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때로는 교회 밖에서라도 진리를 찾는 이들이 말씀을 붙잡고 교회를 향해 질문하고, 심지어 교회를 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현대 교회가 형식화, 제도화되면서 잃어버린 ‘영적 예민함’에 대한 경고입니다.본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세상을 섬기며, 진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체제 유지’와 ‘권력 구조’에만 몰두하다 보면, 정작 새롭게 오시는 주님의 역사를 놓쳐 버리기 쉽습니다. 마치 헤롯과 그 수하들이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식에 기뻐하기는커녕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분투한 것처럼, 교회 안에도 그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배우는 교훈 중 하나는, “이미 보았다고, 이미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영적 눈을 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 9:41 참조). 수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공부하며, 신학에 대해 어느 정도 논의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영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일들을 행하시는지를 민감하게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하나님과 무관해 보이던 자들’이 오히려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께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동방박사가 보여 준 ‘참된 예배자의 모습’은 매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첫째, 그들은 별을 보고 ‘의심 없이’ 떠난 것이 아니라, 보이는 표적에 신비롭게 끌려 단순히 궁금증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베들레헴까지 몸소 이동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드리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가치를 넘어서, 그들이 예수님을 진정한 왕이자 신으로 받아들였음을 상징합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방향 전환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 헤롯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2)는 구절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꿈에 지시하신 바를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에 대한 민감한 순종’을 상징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이와 같이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났다면, 헤롯이象征하는 세상 권력과 타협하는 기존 삶의 방식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논리, 욕망, 탐욕, 거짓, 두려움, 폭력을 숭배하던 길에서 돌이켜, 오직 예수님을 따르고 그의 길에 순종하는 방향으로 삶의 궤도를 바꿔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경배자의 태도이며, 동방박사가 우리에게 남긴 예배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령한 학살 사건입니다(마 2:16-15), 결국 구원 사역을 계속 이어 가십니다. 이는 어떤 세상의 힘도 하나님의 섭리를 꺾을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전개는 교회가 종종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철저히 실존의 현장 속에서 치열한 대가를 치르며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아기로 오셔서 평온하게만 사역하신 것이 아니라, 태어남부터 사방의 위협과 박해 속에서 자라나셨다는 점, 그리고 결국 공생애 사역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끊임없는 방해와 핍박 속에서 진행되었고, 최후에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희생을 겪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결코 편안한 낭만이 아닙니다. 복음은 세상 권력이나 악에 맞서는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이자 승리이며, 동시에 그 가운데 수많은 갈등과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역사의 장’에서 펼쳐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성경 본문을 토대로, 성도들에게 “이 시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늘 강조해 왔습니다. 2천 년 전 헤롯 왕의 시대처럼, 지금도 가짜 왕, 곧 세상의 어두운 권세가 여전히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권력의 논리, 물질주의, 자기중심적 욕망 등이 우리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하나님의 실제 움직임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도 그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시지 않고, 형식과 제도, 세속적 가치만 숭상하다 보면, 동방박사와 같은 이방인이 오히려 교회를 깨우는 역전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이 왔듯,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고 경배하려는 자들을 곳곳에서 일으키십니다. 교회 안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메시아를 경배하려는 진실함과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느냐는 점입니다. 별을 보고 기꺼이 찾아온 자들에게 하나님은 친히 길을 열어 주시고,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표적에 반응하는 자들이 참된 경배자로 서게 됩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가장 큰 도전은,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입니다. 헤롯처럼 두려움과 질투, 자기 권력 유지 욕심에 사로잡혀 메시아를 배격할 것인가? 혹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언의 말씀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되, 실제 행함과 경배로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아니면 동방박사들처럼 하나님의 표적에 민감히 반응하여, 실제로 걸음을 옮기고 경배와 헌신을 드릴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깊숙이 파고듭니다.

더 나아가, 헤롯의 학살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믿음의 여정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결코 ‘고난과 아픔’이 없는 안전지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목자나 동방박사들의 기쁨 뒤에는, 헤롯이 휘두르는 폭력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죽임당하는 비극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과 혼란의 역사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를 꺾이지 않게 하시고, 예수를 온전한 구원자로 세워 주십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의 악과 고통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신뢰하도록 이끕니다. 예수님의 삶은 결국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었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장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대가를 치르며 펼쳐지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미시적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 2장의 사건들은 과거 한 시점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생생한 메시지를 줍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동방박사처럼 주님을 찾아 경배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다는 교만, 기득권을 지키려는 두려움, 세속적 권력과 협력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주님의 오심을 놓치게 될까?” 이것은 단순히 성탄절에 한 번 떠올리고 지나치는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영적 현주소를 돌아보게 만드는 날카로운 물음입니다.

장재형목사가 계속해서 역설해 온 바도 동일합니다. 그는 “재림 신앙”을 지닌 기독교인들이 마태복음 2장의 메시지를 반드시 되새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재림을 고대한다고 말은 하면서, 오히려 이미 전통 안에 안주해 버려서, 막상 주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때는 알아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거부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마치 율법과 선지서를 달달 외우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정작 ‘메시아의 탄생’을 놓쳤던 역설적 장면이, 교회 안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깨어 있어야 하고, 성도들은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보여 준 ‘영적 민감성과 헌신’은, 무엇보다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한 귀감이 됩니다. 물론 그들은 점성술사라는 배경을 지닌 이방인이었고, 현대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낯선 종교·문화적 배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서라도 진리의 빛을 향해 나아갔고, 자신의 삶과 물질을 아낌없이 들여 경배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혹 우리가 “나는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했으니, 이제 믿음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 마음이 영적 침체에 빠진 증거일 수 있습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의 사례처럼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며, 주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실제적인 걸음을 떼는 태도가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마태복음 2장은 이렇게 어둡고 위험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겸손히 탄생하셔서 온 인류를 향해 빛을 비추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 줍니다. 헤롯은 흉계를 부렸고 수많은 아기들이 희생당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 어떤 악의 방해도 꺾을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진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헤롯에 해당하는 다양한 형태의 세력, 곧 진리를 거부하고 폭력과 거짓을 일삼으며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권력 구조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예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여전히 열려 있고, 교회는 끊임없이 ‘참 왕’을 경배하는 예배 공동체로서 부름받았습니다. 그 길을 걷는 데에는 고난과 희생이 따르지만, 마침내 진정한 구원과 참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결국 마태복음 2장이 보여 주는 대립 구도(헤롯 vs. 예수님, 유대 종교 지도자들 vs. 동방박사)는, 언제나 반복되는 구원의 드라마이자 도전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경배하는 길은, 세상의 방식과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종교적 교만과도 충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참 빛을 비추시며, 인간 역사 한가운데 들어오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해서 깨어 있어야 하는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바로 이 본문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동방박사처럼 ‘하나님의 표적’을 발견할 때 즉시 반응하여 예수님께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가 가진 성경 지식이 오히려 영적 교만이 되어, 주님의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놓치게 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될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고 기뻐하며 경배할 것인가, 아니면 낯섦과 불편함 때문에 거부하거나 외면할 것인가?

장재형목사 역시 이 본문을 인용하며, “교회가 부흥한다”는 말은 결국 ‘새롭게 깨어난 사람들’이 일어나고, 그들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향해 경배의 걸음을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깨어남은 종종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처럼 기존 교계 밖의 이들이 교회를 깨울 수도 있고, 혹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 보이지만 정작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은 회개와 각성으로 다시 거듭나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태복음 2장의 메시지에서 파생되는 실제적 적용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는 동방박사들의 질문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셨고, 오늘도 우리의 삶 한가운데 임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진정 ‘유대인의 왕’, 곧 온 우주의 왕, 나의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예배와 헌신, 그리고 순종의 모습으로 증명됩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 그 누추한 말구유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결국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가는 복음의 물결이 되었습니다. 그 물결은 지금도 이어져,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 가운데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가, 아니면 말만 하며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관찰자로 남아 있는가?

마태복음 2장은 이처럼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지극히 현실적인 교훈을 줍니다. 세상의 잔인한 권력, 종교적 교만, 영적 무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이방인들의 열정,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펼쳐지는 드라마 속에서,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어떻게 세워지는지 명확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길의 출발은 어느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는‘떡집’에서의 아기 예수의 울음 소리였습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복음은, 이 세상을 바꿀 ‘진짜 왕의 통치’를 예고합니다. 이를 깨닫고 동참하는 자들에게는 기쁨과 구원이 주어지고,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헤롯의 파멸과 같은 어두운 결과가 기다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아기 예수를 경배하며, 그분을 따르는 길에 서야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 선포는 2천 년 전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심령을 향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아가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는,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떡을 먹고, 생수의 강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이 던지는 도전을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동방박사들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는 고백을,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실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교회가 다시금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소명 중 하나입니다. 동방박사와 같은 영적 각성, 그리고 헤롯 같은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참 왕을 찾는 경배의 자세가 곧 우리가 서야 할 길임을, 이 본문을 통해 다시 확인합니다.

www.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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