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성전과 기도

1. 성전과 환난 속에서의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해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역대하 7장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장면과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 성전이 지닌 본질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역대하 7장 11-12절을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한 후 왕궁으로 들어갔다가,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성전을 제사하는 곳으로 삼겠다고 선포하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선언이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솔로몬이 지어 올린 성전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집’이 된 것이다.

성전이란 무엇인가? 장재형목사는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장면(창세기 28장)을 언급하면서, 성전의 뿌리가 바로 벧엘이라고 설명한다. 야곱이 잠을 자다가 꿈에서 사닥다리가 하늘까지 이어져 있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 사건은 이후 성전이 갖게 될 본질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곳,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지점”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러한 의미에서 출발한다. 그는 거대한 규모의 성전을 완성하고,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다”고 말씀하시는 축복을 받는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죄 사함을 받고,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집”을 얻게 된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했다.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와 예배는 단지 제도적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실질적인 통로가 된 것이다.

역대하 7장 13-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거나, 메뚜기가 토산을 먹어버리거나, 염병이 돌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하신다. 이 약속은, 인간의 죄로 인해 닫힌 하늘이 다시 열리고, 육신의 연약함과 삶의 곤궁, 코로나와 같은 역병조차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넘어설 수 있는 장애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기도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구할 수 있으며, 그분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땅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근거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길이 생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상이 아무리 죄악에 빠져 있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라 하더라도,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땅을 고치신다”는 이 위대한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는 지난 수년간의 전 세계적 팬데믹 상황과, 이에 수반되는 교회의 어려움과 재정적 곤궁, 교회 건물의 매매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절망 중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께 무릎 꿇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라는 점을 재차 일깨운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스가랴 14장의 예언을 상기시키는데, 여기서 예언자는 환난의 때에 도망하여 피난처를 얻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실 것이라고 말한다(슥 14:4-5). 특히 감람산에 주의 발이 서시게 될 것이라는 이 예언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하셨던 올리벳 담화를 떠올리게 한다. 마태복음 24-25장에서 예수님은 종말과 재림, 환난의 징조 등을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나누셨다. 예수님께서는 환난이 임하면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셨고(마 24:16),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환난의 때에 교회가 무너져 버리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피난처와 안식처를 주신다”는 신앙고백을 전한다.

여러 가지 현실의 고난 속에서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고,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팔려 나가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그 믿음의 노력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 피난처들을 주시고, 실제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역사들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유럽의 한 지체가 절망 중에 의식을 잃었으나, 지체들이 합심하여 간구했을 때, 의식이 돌아와 다 함께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간증 등은 그 대표적 사례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추운 겨울이나 삶의 광풍, 그리고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극심한 환난의 때에 용기를 내어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붙잡아야 할 기준임을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우리의 몸이 연약하고, 삶의 형편이 열악하고, 온갖 문제가 눈앞에 닥쳐와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면, 우리의 힘이 부족하고 여건이 안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귀히 여기시고 역사하신다.

특히 성전 혹은 교회를 건축하는 것, 교회가 어떤 공간을 얻어 본부를 세우는 것 등은 단순히 건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통로”를 마련하는 일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세우는 일이며, 동시에 “세계 선교를 위한 거점”을 준비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올리벳밸리(Olivet Valley)’ 건축 사례를 든다. 이 공간이 장차 세계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영적 센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많은 이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재형목사는 교회의 사명이 단지 모이는 예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한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다. 1세기의 사도행전 교회부터 시작해서, 교회는 늘 흩어져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다. 20세기의 교회 역시 마찬가지로, 모이는 예배와 함께 흩어져서 불신자와 세상을 향해 사랑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본부를 세우는 것은 궁극적으로 ‘파라처치(parachurch) 정신’을 가지고 선교와 섬김, 구제와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가 되는 데 목적이 있다. 건물만 들어서고, 화려한 예배당만 꾸미는 것은 교회의 진정한 소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 환난의 때에 무엇을 했느냐?”라고 물으실 때, 우리가 선교와 구제, 기도와 봉사를 통해 사랑을 실천한 흔적을 찾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에 더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교회의 영적 회복과 하나 됨을 위해 힘써야 한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수억 명이 감염되는 전례 없는 재앙을 겪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피난처를 제공하신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듯이, 오늘날 우리의 삶의 자리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임재는 기도의 골방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헌신의 현장에서 경험된다.

장재형목사가 설파하는 역대하 7장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성전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통로’이며, 환난 중에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스가랴 14장과 예수님의 감람산 담화(마 24-25장)의 맥락이 더해져, 환난의 때에도 우리의 영적 피난처가 되시고, 세계교회가 모여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환난 속에서도 소망을 놓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그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성전을 세운 솔로몬의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진정한 이해이자, 장재형목사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핵심이다.

2. 바울의 인간미와 화해의 정신, 그리고 사랑을 통한 겨울의 극복

두 번째로 장재형목사는 디모데후서 4장 9-13절을 인용하며, 바울 사도가 지닌 ‘예수의 향기’를 조명한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며,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극심한 고난을 겪었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그런 믿음의 거장 바울조차도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그는 겨울이 되기 전에(4장 21절 참조) 함께 있기를 소망했고, 갈라디아나 달마디아로 떠나버린 동역자들과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남아 있는 고독을 토로한다. 하지만 그 곁에는 ‘누가’라는 의사가 여전히 동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디모데를 향해, 꼭 보고 싶으니 속히 오라고 요청한다.

바울의 이 부탁은 인간적인 사소함이나 연약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바울이 보여주는 인간미와, 외로움 속에서도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사랑의 자세야말로 진정한 복음적 태도라고 역설한다. 겉으로 강인해 보이고 흔들림 없어 보이는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실제 삶 속에서는 추위를 느끼고, 배신을 겪고, 누구가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디모데에게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겨울 옷과 성경(가죽종이로 된 책)을 가져오라”고 청한다. 바울은 추운 감옥에서 몸을 보호할 겉옷과, 영의 양식을 채워 줄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딤후 4:11)는 바울의 말이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마가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도중 중도하차를 한 전력이 있었다. 험준한 길을 함께하지 못하고 도망치다시피 떠난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고, 그로 인해 두 사도는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행 15:37-39).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기용하려 했으나, 바울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바울은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이 마지막 겨울일지도 모르는 시기를 보내면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까지 말한다. 이는 마가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크게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두고, 진정한 사랑과 화해란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적인 계산과 판단으로, “이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배척하거나, “저 사람은 내게 부담이 되는 사람”이라며 내쳐 버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엡 2:14)고 성경이 증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화해하게 하셨으며, 죄로 인해 갈라진 모든 벽을 허무셨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화해와 사랑을 따른다면, 우리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막힌 담을 허물고, 상처받고 실패했던 사람조차도 다시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옛날 마가 때문에 바나바와 심각한 이견이 생겨 갈라섰지만, 그 뒤로 바울은 끊임없이 마가를 기억했고, 바나바와의 깊은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 나중에는 마가에 대한 마음이 풀어져,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랑의 결실이 바로“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는 나의 일에 유익하다”는 고백이다. 이는 갈등이 많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 쉽게 부딪히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꼭 필요한 정신이다. 장재형목사는, 사역이 확대되고 교회가 커질수록 오히려 ‘서로 다른 의견의 충돌’이 잦아질 수 있는데, 그때마다 갈등을 풀고 화해로 나아가는 복음적 태도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 가룟 유다를 붙들고자 하셨듯이, 우리 역시 마지막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말고 품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빌레몬서를 예로 들기도 한다.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도망친 종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 빌레몬 사이의 화해를 주선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된 자라면, 결코 인간 관계에서도 불화한 상태로 머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오네시모를 받아주라”는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내며, 자신이 오네시모의 빚을 대신 지겠다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화해의 정신이다. 여기에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는, “결국 남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다. 생로병사로 대표되는 인생사 속에서, 언젠가 우리 모두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 한정된 인생길에서, 가장 값진 열매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갈등과 상처를 뛰어넘어 타인을 붙드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바울은 추운 감옥에서 자신을 데마 등 여러 동역자들이 떠나간 고독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논한다.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겉옷’이라는 물리적 보온뿐 아니라, ‘가죽종이에 쓴 책’, 곧 영적인 양식인 말씀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동역자와의 화해된 관계’가 주는 따뜻함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우리는 깊은 감동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에도 추위는 존재한다. 비단 계절적 추위만이 아니라, 마음의 추위, 갈등과 다툼, 배신과 상처, 무관심과 냉대가 우리의 삶을 얼어붙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용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아직도 우리가 돌이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면, 우리는 혹독한 겨울 한복판에서도 따뜻함을 경험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단지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다. 바로 사람을 세우고 사랑을 세우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헌금, 노력, 기도가 모여서 건물이 세워지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건물을 통해 세계교회가 연합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고,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다가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다. 교회가 아무리 많고, 예배당이 커진다 해도, 거기에 사랑과 선교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교회 본부를 세우는 것도, 여러 지역에서 피난처와 안식처 역할을 할 거점들을 마련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기 위함이다. 누군가가 절망 중에 있을 때, 그 곤궁을 함께 짊어지고 기도하며, 회복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건물이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팬데믹 기간에 전 세계 5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억 명이 감염되었다. 그 어떤 전쟁도 이렇게 많은 인명을 앗아간 적은 없을 정도로, 전 인류가 고통을 겪었다. 이런 시대적 아픔 앞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세상의 고통과 동떨어져 자족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진실한 사랑과 기도를 통해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화해의 정신으로 각자 처한 자리에서 충실하게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서신에서 몸소 보여준 사랑의 모범이요,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의 실천이다.

장재형목사는 디모데후서 4장의 말씀을 결론 삼아, 교회 안에서 상처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사람의 의견은 다양하고, 인간의 마음은 갈대 같으며, 인심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듯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그런 불안정 속에서도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서로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다. 바울 사도가 “마가를 다시 받아들이고, 그는 나의 사역에 유익하다”고 고백한 그 지점에 기독교인의 공동체성이 놓여 있다. 사회 곳곳에서 증오와 분열이 만연해 있고, 세상이 빠른 변화 속에서 서로를 쉽게 버리고 잊어버리는 풍조가 넘치더라도, 교회만은 사랑을 붙들고 바울처럼 “속히 내게로 오라”고 요청하며, “겉옷과 가죽종이를 갖다 달라”고 요청하는 인간적이고도 따뜻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이 두 축—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의 영성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균형을 이룰 때 온전해진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의 처소에서, 우리는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삶의 곤궁과 전염병마저도 넘어설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한다. 동시에, 갈등이 있더라도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 붙들어 주며, “끝까지 사랑을 놓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 때,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마음의 온기를 간직할 수 있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디모데후서 4장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목표는 단지 내 개인이 구원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며, 함께 선교와 섬김의 비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신 말씀처럼,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지다. 사랑이 식어버린 교회는 성전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반대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 보이더라도, 성도 간에 뜨거운 사랑이 있고, 화해와 용납이 있는 교회라면, 그곳에는 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고 은혜의 기적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명확하다. 역대하 7장의 약속대로, 환난 중에도 기도하여 땅이 고침을 받도록 해야 한다. 스가랴 14장의 예언처럼, 주님의 임재가 있을 감람산의 피난처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본받아,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겉옷과 말씀, 그리고 화해의 정신을 통해 따뜻함을 유지해야 한다. 마가를 다시 부르는 바울의 음성처럼, 우리가 갈등한 이들마저도 다시 품고, 사랑으로 초대하는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영적·실천적 메시지를 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아직도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잃지 말라고 권면한다.

 “내가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듣고 죄를 사하시며 땅을 고치신다”는 역대하 7장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동시에, 사람 간의 문제로 인해 아픔이 생겼다면, “화해”라는 복음의 정신을 따라 상처 입은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마가가 내게 유익하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사랑은, 우리가 피해야 할 이가 아니라 끝까지 붙들어야 할 이가 누구인지를 되새기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세우고, “온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가며,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로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건축하고, 본부를 세우며, 크리스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려는 모든 수고는 결국 “사랑”이라는 동기가 흔들리지 않을 때 가장 빛난다. 사랑이 흔들리면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이룬다 해도 참된 의미는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이 견고히 자리 잡으면, 우리의 헌신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되고, 지금의 추운 겨울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적으로 따뜻한 겨울’로 바뀔 것이다. 그것이 곧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 말미에서 내비친 ‘예수의 향기’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화해와 용납, 그리고 사랑’의 정신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대로, 우리는 이 자비의 세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환난과 광풍, 역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세대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예배하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여유 있고 힘이 넘쳐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으므로 가능하다. 한편, 교회 안에서도 갈등이나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럴 때일수록 바울과 마가, 바나바의 관계 회복이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복음이 우리 안에 뿌리 내렸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어야만, 혹독한 겨울을 함께 이겨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랑은, 교회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과 기도가 그저 공사 현장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로도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그것을 “세계교회를 향한 사랑이 담긴 헌신”이라고 보았다. 우리 후손들에게도 “저 추운 겨울에, 교회를 위해 몸 바쳐 수고하는 성도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라고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사랑의 이야기가 교회를 존속케 하는 힘이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역대하 7장의 기도와 스가랴 14장의 예언,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서의 바울의 간곡한 부탁을 품고, 오늘도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찾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때로는 건물이 아닌 마음의 성전을 세워야 하고, 때로는 교회 공동체 내의 갈등을 화해의 정신으로 풀어내야 하며, 때로는 전 세계를 향한 선교적 비전을 실천하는 일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모든 것의 배후에는 “주님의 사랑이 식지 않아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가 있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진리를 삶에 적용하고, 그것을 통해 “거룩한 성전을 건축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라는 초청이다.

장재형목사가 설교에서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그 최선이 늘 기도와 사랑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뒤의 모든 결과는 주님의 손에 맡긴다. 이번 겨울이 더욱 춥고 혹독해 보일 수 있고, 세계가 팬데믹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가 이긴다”는 신앙적 확신을 기억하자. 바울이 감옥에서 선교 동역자들을 그리워하며 요청한 ‘겨울옷, 성경, 그리고 마가’는 어쩌면 우리 삶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필수품이다. 한 겨울밤을 견디게 해주는 옷처럼, 우리 영혼을 보호해 줄 성경 말씀처럼, 때론 갈등이 있었으나 다시 만날 수 있는 마가 같은 사랑의 복원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적 유산이다.

이처럼 두터운 신앙과 사랑의 가치를 되새기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에서 기도로 환난을 뚫어내고, 바울이“마가를 다시 데려오라” 했던 그 화해의 정신으로 서로를 섬길 수 있다면, 지구상에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든든한 공동체가 이 땅에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 속에서 실천하고 반영하는 살아 있는 성전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핵심이자, 역대하 7장부터 디모데후서 4장, 그리고 스가랴 14장, 마태복음 24-25장에 이르는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복음의 굳건한 근본이다. 우리가 이 사랑과 화해,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붙들고 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는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통해, 추운 겨울을 걷는 우리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따뜻함을 부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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