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고립을 넘어 안디옥의 소명으로: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세계선교의 신학적 통찰

피터 브뤼헐의 대작 ‘바벨탑’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거대한 건축물 속에 갇힌 인간의 근원적인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늘에 닿으려 했던 그들의 치열한 노동은 역설적으로 서로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소통의 단절로 귀결되었습니다. 높이 오르려는 욕망은 가득했으나, 정작 곁에 있는 이의 목소리를 담을 귀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교회의 풍경 역시 이러한 바벨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수적인 확장과 화려한 성공이라는 성벽을 쌓는 데 몰두하다가, 정작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가 조명하는 안디옥교회의 정신은 더욱 눈부신 빛을 발합니다. 안디옥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 앞에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고(Kenosis), 그 비워진 통로를 통해 복음의 생명수를 온 세계로 흘려보냈던 ‘거룩한 출구’였기 때문입니다.


흩어짐의 미학: 경계를 허물고 피어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안디옥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선 신학적 함의를 지닙니다. 그곳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울타리가 해체되고, 헬라인과 다양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조우했던 영적 용광로였습니다. 복음이 한 민족의 혈연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진리로 우뚝 서게 된 상징적 장소에서, 비로소 세상은 믿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헌사했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안디옥교회에 주목하는 핵심은 교회의 본질을 ‘폐쇄된 보존’이 아닌 ‘역동적인 운동성’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는 구심적(Centripetal)인 공동체인 동시에, 그들을 다시 세상 한복판으로 파송하시는 원심적(Centrifugal)인 공동체여야 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지역적인 뿌리를 견고히 내리면서도, 그 시선은 이미 땅끝이라는 세계선교의 지평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본래적 호흡입니다.


성령의 주도권: 인간의 계산을 압도하는 순종의 질서

이 선교적 흐름을 지탱하는 가장 큰 축은 바로 성령의 주도권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위대함은 탁월한 전략이나 풍부한 재정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무릎을 꿇었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사건은 치밀한 경영 전략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비움과 순종의 열매였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가 외형적인 성과나 효율성을 따지기에 앞서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믿음이란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멈춰 서서 주님의 뜻을 먼저 경청하는 자세에서 시작됩니다. 성령께 길을 묻는 이 겸손한 태도야말로,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교회를 바로 세우는 ‘거룩한 질서’의 출발점이 됩니다.


골로새서가 선포하는 기독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디옥의 선교 정신은 골로새서에 나타난 깊은 기독론적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도덕적 스승이나 종교적 상징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를 경계합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요, 무엇보다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진정한 중심은 시대의 유행이나 사람들의 기호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이 흐려지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복음은 그저 고상한 윤리적 조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 뿌리 내리는 신앙: 성경 묵상은 지식의 축적을 넘어, 말씀이 삶의 뿌리가 되어 실제적인 열매를 맺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 몸의 순종: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라면 교회는 그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유기적인 몸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가치관을 압도하는 사랑과 거룩, 그리고 헌신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신학적 통찰이 삶의 현장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리는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살아있는 빛이 됩니다.

공교회성의 회복: 기도와 감사로 엮인 하나의 몸

안디옥교회의 또 다른 아름다움은 그 뜨거운 열정 속에 흐르는 ‘질서’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성공에 도취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복음의 정수를 확인했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심도 있게 토론하며 공교회성(Catholicity) 안에서 하나 됨을 실천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자기 확장에만 매몰될 때 사랑은 진영 논리로 변질된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서로를 위해 간절히 중보하고,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함께 기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이기적인 섬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 ‘우주적 한 몸’으로 거듭납니다.

  • 영적 호흡으로서의 기도: 기도는 멀리 떨어진 지체들을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며, 선교를 지속하게 하는 내적인 근력입니다.
  • 겸손한 회개: 복음의 화려함을 자랑하기보다 복음이 요구하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름받은 자’라는 정체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열매로 증명해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의 완성: 세상을 향해 쉼 없이 흘러가는 사랑

안디옥의 정신과 골로새서의 기독론은 결국 세계선교라는 하나의 거대한 강으로 수렴됩니다. 복음의 생명력은 특정 지역이나 문화적 전유물로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내부적인 충만함에 만족하는 저수지가 아니라, 그 충만함을 세상 밖으로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발원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사 파송이나 교회 개척은 자원의 손실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바울이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고 편지로 그들을 양육했듯, 오늘의 교회도 복음이 뿌리내릴 새로운 토양을 끊임없이 개간해야 합니다. 교회가 귀중한 인적, 물적 자원을 움켜쥐는 대신 세상으로 기꺼이 내보낼 때, 복음은 비로소 박제된 문자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됩니다.

선교는 특별한 몇몇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터, 가정,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화하는 모든 성도의 일상적 헌신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기를 포기하고 성령의 역사와 교리적 확신 위에 설 때, 우리 또한 안디옥처럼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는 글: 당신의 신앙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습니까?

글을 맺으며 우리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나의 영적인 안락함을 지키는 데 몰두하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의 준엄한 부르심 앞에 나 자신을 내어놓고 있는가?” 교회의 머리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면, 우리의 믿음 또한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흘러가야 마땅합니다. 단순히 모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깨달은 은혜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안디옥의 정신이 오늘 우리를 다시 부르고 있습니다. 거창한 구호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성령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를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며, 곁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감사하는 그 작은 순종이 모일 때, 교회는 다시 복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길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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