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스름한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 마주 선 인간의 형상은 대개 초라하고 보잘것없습니다. 거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헝클어진 머리칼과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눌린 지친 눈동자를 냉정하게 비춥니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은 바로 이러한 ‘거울’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비추어 우리가 얼마나 함량 미달인 존재인지, 우리의 영적 옷매무새가 얼마나 추하게 흐트러져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우리의 양심을 찔러옵니다.
그러나 거울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거울은 얼굴에 묻은 더러움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 더러움을 직접 씻어내 줄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더럽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초대 교회의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로 이 차가운 율법의 거울 앞에서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침투했던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은 ‘율법 준수’라는 무거운 멍에를 다시 씌움으로써,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 그들의 신앙 여정을 인간의 육체적 노력과 공로로 변질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위기 속에서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갈라디아서 3장 강해를 통해, 거울을 넘어 우리를 정결케 씻기시고 의의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신학적으로 조명합니다.
탕자의 귀향: 계산적인 율법과 무조건적인 용서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적으로 사용하는 화가 렘브란트가 생애 마지막에 남긴 불후의 명작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림 속 탕자는 다 해진 신발과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친 채, 아버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의 등 뒤편 어둠 속에는 동생의 귀환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맏아들이 서 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집을 지켰으나,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행위’와 ‘보상’이라는 계산법에 매몰된 인물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전형적으로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을 행했는지, 혹은 무엇을 어겼는지를 꼼꼼히 계산하며 정죄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하지만 그림 속 아버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돌아온 아들의 존재 자체를 떨리는 손으로 끌어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갈라디아서 3장을 강해하며 이 비유에 담긴 복음의 정수를 꿰뚫어 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도다”라고 탄식했던 이유는, 그들이 이미 아버지의 따뜻한 은혜의 품에 안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형의 차가운 계산법인 율법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장 목사는 칼빈과 루터의 신학적 통찰을 빌려, 율법이 죄를 자각하게 만드는 ‘몽학선생(가정교사)’으로서의 기능은 수행할 수 있지만, 결코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주체가 될 수는 없음을 명확히 규명합니다. 렘브란트의 화폭에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이 탕자의 초라한 어깨를 덮어주듯,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전전긍긍하는 우리를 덮어 ‘의롭다(Justification)’ 칭해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 덕분에 가능한 신비입니다.
별을 우러러보는 믿음: 아브라함의 언약과 확신
우리는 흔히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나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계시하는 믿음은 훨씬 더 역동적이고 광활한 지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진정한 믿음의 원형을 제시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시점이 율법이 성문화되기 수백 년 전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율법 조문이 적힌 가죽 두루마리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깊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들려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증언하듯이, 아브라함의 신앙은 익숙한 곳에 머무는 안주가 아니라 미지의 땅을 향한 떠남이었으며, 치밀한 계산이 아니라 거룩한 모험이었습니다. 장 목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이 바로 이 ‘바라봄’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율법의 행위에 집착하는 것은 땅의 먼지만 보고 걷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믿음은 고개를 들어 약속이라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N.T. 라이트와 같은 신학자들이 강조했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개인의 안위를 넘어 온 열방이 복을 받는 공동체적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명처럼, 오늘날 우리가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도덕적 완벽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이어져 온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문화를 넘어선 복음: 은혜를 번역하는 선교의 사명
‘오직 은혜’라는 복음의 핵심 가치는 문화적 장벽을 넘어 타문화권으로 전파될 때 더욱 세심한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공로 사상이나 인과응보의 논리가 뼈아프게 박힌 문화권에서 ‘조건 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는 때로 낯설고 비상식적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1장의 통찰을 인용하며,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 각자의 우상을 숭배하며 죄의 결박 아래 있다는 보편적 비극에서 선교의 접촉점을 찾습니다. 죄의 본질은 도덕적 타락 이전에, 창조주와의 생명적 관계가 끊어진 단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현장에서 시급한 것은 차가운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삶의 언어로 은혜를 번역해 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다가갔던 ‘성육신적 접근’처럼, 우리 또한 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정서와 언어 속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세례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을 넘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의미하듯이, 선교는 우리가 복음이 필요한 이들과 삶을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체화하는 과정입니다.
도널드 거스리가 강조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의 원리는 선교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인종과 계급, 신분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됨을 실천적으로 보여줄 때, 복음은 그 어떤 논리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맺음말: 거울을 깨고 아버지의 품으로
율법의 거울은 언제나 차갑고 엄격하지만, 은혜의 품은 한없이 따스하고 포근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거울 앞에서 자신의 흠결을 세며 자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늘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 끝없는 사랑을 향유하고 있습니까?”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발가벗겨서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는 역할을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모든 정죄로부터 해방하여 성령이 이끄시는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제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소망의 항해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그리고 이 시대의 강단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가슴 벅찬 복음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