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and See
복음서

10 / 14 / 2026

옥합을 깨뜨린 것이 복음인 이유

옥합을 깨뜨린 것이 복음인 이유

한 번 깨진 옥합은 다시 돌아갈 수 없고, 한 번 쏟아진 향유는 다시 담을 수 없다. 그 사랑은 십자가의 자기 비움을 미리 비춘다.

어떤 사랑은 너무 깊어서, 처음에는 사랑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서양의 오래된 성화들 속에서도 향유를 든 여인은 종종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지만, 그 침묵의 장면은 늘 강한 질문을 남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왜 아낌없이 쏟아야 했을까.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설교가 붙드는 핵심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비추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은 곧바로 그것을 허비라고 불렀습니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 말은 이성적이고 정의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의 한 일도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진 옥합과 십자가의 사랑

왜 이것이 복음일까요.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잘 해 보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을 내어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자신을 쏟으셨고, 그 사랑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적이며 어리석어 보일 만큼 철저한 자기 비움이었습니다. 한 번 깨진 옥합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고, 한 번 쏟아진 향유는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도 일부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 내어준 사랑이었습니다.

여인과 유다, 신앙의 갈림길

이 설교가 더 아프고도 깊은 이유는, 바로 다음 장면에 유다의 배반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가장 귀한 분을 팔아넘겼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을 깨달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을 허비로 여겼습니다. 주님 곁에 오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머리로만 알면 계산이 남고, 복음을 마음으로 받으면 헌신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 안의 옥합

사실 우리도 이 두 사람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든 일상 속에서든, 사랑보다 효율을 먼저 따질 때가 많습니다. 기도보다 결과를, 순종보다 계산을, 믿음보다 손익을 앞세우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늘 반대로 말합니다. 사랑은 남는 것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결국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처럼, 이유를 따지기 전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는, 주님께 드리기 아까워 아직 꼭 쥐고 있는 옥합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