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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2026. 7. 18.

'내 양을 먹이라'의 현재성

'내 양을 먹이라'의 현재성

디베랴 바다의 새벽 — 부활하신 주님이 차려주신 숯불 앞에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건네신 그 질문은 오늘 나의 일상으로 이어집니다. 장재형 목사의 요한복음 21장 강해.

숲의 가장 깊은 적막은 흔히 바람이 지나가며 남기는 나뭇잎의 마찰음으로만 깨진다고들 말하지만, 내가 기거하는 이 숲속 마을의 고요는 어느 순간부터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둑한 새벽 창밖에서 들려오는 것은 발자국도 아닌 발톱의 미세한 긁힘, 마른 흙을 밟는 잔잔한 소리, 그리고 서로의 기척을 확인하는 숨의 교환이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만 해도 '고양이'라는 단어는 풍경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눈에 띄지 않던 개체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번식했고, 이제는 스무 마리가 훌쩍 넘는 대가족이 숲의 또 다른 주인처럼 자리를 잡았다.

작은 친절에서 시작된 생태계

이 작은 세계의 시작이 거대한 계획이나 제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한 초등학생 아이의 순수한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늘 내 마음을 멈칫하게 한다. 베란다에 놓인 작은 사료 그릇 하나가 숲속의 고양이들을 불러 모았고, 그 작은 친절은 여섯 마리의 가족이 되었다가 다시 열 마리의 새끼들로 불어났다.

그러던 중 유독 눈에 밟히는 존재가 나타났다. 양쪽 눈의 색이 다른, 이른바 오드아이(Odd-eye)를 가진 흰 고양이였다. 신비로운 외양은 사람의 시선을 끌지만, 숲의 무리 안에서는 그 다름이 오히려 균열이 된다. 녀석은 철저히 배제당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그와 마주쳤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거칠게 생존하는 야생의 삶 한가운데에서도, 돌봄과 사랑을 갈구하는 그 욕구는 인간의 영적 기갈과 닮아 있었다. 먹이는 배를 채우지만, 받아들여짐은 존재를 채운다. 이 둘이 분리될 때 생명은 살아도 마음은 떠돌게 된다.

부활 이후의 세계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내 사유는 뜻밖에도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의 요한복음 21장 강해로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을 단지 복음서의 덧붙임이나 에필로그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 신앙이 삶의 현장에서 사명으로 응결되는 결정적 장면, 곧 "부활 이후의 세계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를 보여주는 정점으로 읽는다.

요한복음 20장이 부활 사건의 역사성과 증언의 확실성을 세워 준다면, 21장은 그 부활이 제자들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육화되어 구체적 사역과 목양의 언어로 번역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이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일관된 강조다. 말하자면 부활은 관념이 아니라 동선이며, 신앙은 감상이 아니라 책임이다.

디베랴 바다의 새벽

디베랴 바다의 새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학이다.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허탈함은, 성실하게 살아도 결과가 비어 있을 때 인간이 느끼는 실존의 무능을 상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인간의 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로 읽는다.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그린 '기적의 고기잡이(The Miraculous Draft of Fishes)'를 떠올리면, 그 해석은 더 생생해진다. 화면 속 제자들의 몸은 긴장으로 팽팽하다. 그런데 그 모든 역동성의 중심에는 오히려 고요한 권위로 서 있는 예수의 존재가 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제자들의 전환점은 "더 열심히"가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는 순종에서 발생한다. 결과는 153마리라는 구체적 수확으로 돌아오는데, 장재형목사는 이 숫자를 단순한 어획량으로 축소하지 않고, 모든 민족을 향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으로 읽는다. 밤의 공허가 새벽의 충만으로 바뀌는 순간은, 인간이 중심에서 내려올 때 시작된다.

숯불 앞의 회복

베드로의 실패를 떠올릴 때 나는 카라바조(Caravaggio)가 즐겨 다루었던 어둠과 빛의 대비를 생각한다. 카라바조의 화면에서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칼날이다. 베드로의 부인은 어둠 속에서 일어났고, 회복은 새벽빛 속에서 일어난다.

장재형목사가 '목양은 십자가의 길'이라고 역설하는 이유는, 돌봄이 단지 친절의 취미가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끝까지 품는 일은 멋진 감성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내와 책임, 반복되는 용서와 장기적인 동행이 필요하다.

나는 렘브란트(Rembrandt)의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을 떠올린다. 그림 속 아버지의 손은 탕자의 등 위에 조용히 얹혀 있고, 그 손은 꾸짖음이 아니라 체온으로 말한다. 탕자는 이미 망가진 얼굴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왜 그랬느냐"보다 "돌아왔구나"로 응답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목양의 정서도 이와 닮아 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논리의 우위가 아니라 사랑의 지속이다.

존재의 회복이 사명을 낳는다

여기서 다시 숲의 장면으로 돌아오면, 내가 고양이에게 건네는 사료는 단지 사료가 아니다. 그것은 "너는 여기 있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고, "너는 배제되어도 끝이 아니다"라는 조용한 선언이다.

장재형목사가 요한복음 21장에서 읽어내는 주님의 식탁도 결국 같은 선언을 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의 조반은, 실패한 제자들을 '사역의 자격'으로 평가하기 전에 '존재의 자리'로 먼저 초대하는 식탁이다. 사람은 존재가 회복될 때 비로소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먼저 "내가 너를 먹인다"는 은혜의 토대 위에 놓인다. 내가 먹임을 받지 못하면, 나는 먹이는 자가 될 수 없다. 장재형목사가 설교에서 계속해서 은혜와 사명을 하나로 묶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혜는 사명을 낳고, 사명은 은혜를 증명한다.

작은 마음 한 켠에서 누군가를 먹이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린다면, 그 마음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이 숯불 앞에서 우리에게 건네신 조용한 초대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답하는 방식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맡겨진 작은 양들을 먹이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