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1.
'보는 경외'에서 '듣는 신앙'으로

밀라노 대성당의 장엄함 앞에서 다시 묻는다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보는 전통과 듣는 전통, 그리고 사는 순종을 하나로 묶는 장재형 목사의 초대.
장재형(장다윗)목사 시선으로 밀라노 대성당을 바라보면, 장엄한 '보는 경외'가 '듣는 신앙'으로 전환되는 결정을 만날 수 있다. 하늘을 찌르는 첨탑과 섬세한 부조, 빛의 강처럼 흘러내리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바로 그 화려한 성전 앞에서 오히려 들음에서 태어나는 믿음을 강조한다.
눈이 열려 경외가 솟구치는 순간에도, 복음은 귀를 통해 심장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그는 초대교회의 스데반과 바울이 성전을 마주하고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으신다"(행 7:48; 17:24)고 선포했던 장면을 다시 불러낸다. 그들의 말은 반항이 아니라 중심 회복을 향한 거룩한 전복이었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라는 성경의 길을 오늘의 예배 현장으로 되돌리자는 초대였다.
보는 전통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너머의 질문
밀라노 대성당은 수학적 비율과 음악적 조화를 돌에 새긴 기도와도 같다. 가톨릭과 정교회 전통은 이러한 공간과 이콘, 성상을 통해 신비를 '보게' 만들었고, 신자들은 거룩의 기품 속에서 영혼의 생기를 배웠다. 장재형목사는 이 전통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선과 진리의 동무이며, 경건을 향한 몸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다만 그는 질문을 던진다. 만일 눈이 영혼의 문이라면, 귀는 어디를 향해 열려 있는가. 오늘의 예배당이 LED 스크린과 음향, 무대 디자인으로 가득할수록, 우리는 더 깊은 침묵과 집중으로 '들음'의 길을 열고 있는가. 보는 자극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귀로 들어오는 말씀이 더 섬세히 분별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때로 화려함을 경건으로, 큰 소리를 능력으로 착각한 채 은혜의 강 앞을 스쳐 지나가곤 한다.
듣는 신앙은 시간의 예술이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듣는 신앙'의 복원을 단호히 요청한다. 들음은 시간의 예술이다. 눈은 대상을 한 번에 훑을 수 있지만, 귀는 문장이 완성되는 끝을 기다리고, 쉼표를 통과하며, 전체 맥락 속에서 한 단어의 무게를 견딘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아들이신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말씀의 종교'요 '들음의 신앙'임을 새긴다. 그는 설교를 들을 때 스스로의 속도를 낮추라고 권한다. 말씀을 펼치면 먼저 침묵으로 마음의 표면을 가라앉히고, 짧은 구절이라도 반복하여 듣듯이 천천히 읽으며, 설교 중에는 요약하려 들지 말고 메시지의 흐름을 타고 귀로 영혼에 새기라고 말한다.
스마트폰을 엎어두고 알림을 끄고, 예배가 끝난 뒤 혼자만의 묵상 시간을 의지적으로 확보하라. 이런 작은 훈련들이 경청의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소란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분간해 내는 귀를 다시 자라나게 한다.
종교개혁이 회복한 '말씀으로의 귀환'
이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의 한 축으로 이어진다. 개혁자들이 성상 숭배를 비판한 일은 단순한 파괴 충동이 아니라 예배의 초점을 다시 강단과 성경, 설교와 회중 찬송으로 돌려세우는 결단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흐름을 '말씀으로의 귀환'이라는 큰 문맥 안에서 읽어내되, 보는 전통이 지닌 경외의 힘과 듣는 전통이 간직한 자유의 진리를 화해시키려 한다.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복음의 충만을 향한 상보성이다.
과거 가톨릭 소유였던 공간을 사용할 때 그 안에 있던 성모마리아상을 원 교구에 정중히 반환했던 경험은, 다름을 존중하는 사랑의 표지였다. 진리의 선을 지키되 이웃의 양심을 배려하는 윤리, 신학적 경계심과 에큐메니컬한 품격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한 셈이다.
Above — Through — In
이 균형감은 바울의 신학, 특히 에베소서의 광대한 시야와 연결된다. 하나님은 만유의 위에(Above)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Through) 일하시며, 만유 안에(In) 거하신다(엡 4:6).
전통 교회의 엄숙한 예전은 초월의 하나님을 수업하게 하고, 오순절적 은사와 기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체험으로 각인시키며, 역사신학과 사회적 실천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하여 일하심을 목격하게 한다. 어느 하나가 전부가 아니다. 셋이 함께 울릴 때 복음의 교향악이 충만해진다.
들은 복음이 삶으로 건너갈 때
주일 아침 문을 열고 들어선 예배당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웅장한 음악, 정교한 영상, 세련된 예배 디자인일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선물이다. 문제는 우리의 귀가 살아 있는가다.
장재형 목사는 예배의 열매를 '좋았다'는 감상 대신 '들은 바가 오늘 내 순종으로 어떻게 번역되었는가'로 점검하라고 가르친다. 들음은 행함을 낳고, 행함 없는 들음은 소비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간단한 훈련을 제시한다. 오늘 들은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적고, 그 말씀을 적용할 한 가지 구체적 행동을 정하며, 그 행동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 점검할 한 동역자를 세우라.
디지털 아고라가 일상의 주파수를 독점하는 시대에는 이 훈련이 더 절실하다. 숏폼과 알고리즘이 주는 '짧고 센 자극'에 길들여질수록, 우리는 길고 깊은 문장을 끝까지 듣는 법을 잊는다. 그러나 들음은 속도를 낮추는 연습이다. 스크롤을 멈추고, 알림을 끄고, 말씀의 문장을 끝까지 듣는 단 3분의 침묵이 우리를 다시 믿음으로 이끈다.
보는 경외, 듣는 믿음, 사는 순종
결국 과제는 명확하다. 종교개혁이 '보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오늘 우리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화해시켜 '사는 것'으로 완성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밀라노 대성당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되, 그 아름다움이 들음으로 인도하는 손짓이 되게 하라고 말한다. 보이는 것은 사랑으로의 초대, 들은 것은 사랑으로의 명령이다. 사랑은 다름을 존중하면서 본질을 붙든다.
이제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사는가. 밀라노 대성당에서 시작된 경외가 나의 하루에 들린 말씀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오늘 단 다섯 분의 침묵을 확보해 보자. 그 침묵 속에서 오늘 들은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한 가지 행동을 결심하며, 함께 점검할 한 동역자를 떠올려 연락하자. 들은 복음은 이렇게 작게 시작해 놀랍게 자란다.
보는 경외를 넘어, 듣는 믿음으로 산다.
Gospel Meditations


